하와이는 추운 겨울이 없기 때문에 1년 내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날씨도 언제나 화창한 지상낙원입니다. 1900년대 초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협회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해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내건 선전문구다. 궁핍과 한파에 시달려온 당시 한국인들에게 솔깃하게 들릴 법도 했으련만 모집 실적은 미미했다. 가족과 친척, 조상의 묘를 남겨두고 낯선 땅으로 떠나는 것은 한국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01년 엄청난 한파가 닥치자 희망자가 한두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 하와이 이민자 102명은 꼭 100년 전인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하와이 생활은 지상낙원이 아니었고 고난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광복 당시 1만명에 불과했던 미국 교포는 625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나 1960년대 10만명을 돌파했다. 현재 공식통계로는 한국계 미국인이 107만명에 이르며 실제로는 200만명 이상이 미국에 살고 있다. 어제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아 교포들의 감회는 새로웠을 것이다.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가난 극복이라는 절박한 명제에 맞서 싸웠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만주로, 연해주로 민족대이동을 한 것이나 독일에 광원이나 간호사로 떠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맨손으로 떠났던 미국 이민자들도 갖은 고생 끝에 미국 사회의 소수인종으로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
다른 지역 교포도 마찬가지겠지만 미국 교포들은 늘 고국을 잊지 못한다. 광복 이전 미국 교포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안창호나 박용만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는 교포사회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광복 이후 군사정권 시절에도,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도, 얼마 전 한일월드컵에서도 한국과 희로애락을 같이했다. 한민족의 DNA를 간직한 교포들은 한국으로서는 소중하고 믿음직한 자산이다. 외국 국적을 취득한 교포들을 한국에 등돌린 사람으로 치부하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다.
이들 코메리칸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를 동시에 이해하고 있는 장점 때문이다. 교포 2, 3세로 내려가면서 이른바 바나나(외모는 한국사람이면서 사고방식은 백인)로 불리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도 한국이라는 문화적 역사적 공감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교민 사회가 미국에서 따로 떨어진 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지에 더욱 융화될 필요가 있다. 해외 동포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이처럼 한민족을 확장하는 개념으로 다뤄져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