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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와의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끝난 후 붉은 물결로 가득한 관중석을 올려다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고 승승장구하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뜨듯해짐을 느꼈다.
이제 한국은 나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존재다. 한국을 사랑한다. 당당히 제2의 조국이라 말할 수 있다.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한국은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며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국팀 감독으로서 한 일을 히딩크식 경영 혁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간에 벌어진 현상에 히딩크 신드롬이란 말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나에 대해 과도한 평가를 해주는 한국 국민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 나도 실수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영웅심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한국팀 감독으로서 한 일은 지난 몇 년간 해오던 일이다. 선수 개개인의 자기 계발을 도왔을 뿐이다.
나는 돌려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나는 선수 개개인에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고 직접적인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선수 개개인의 재능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래야 선수들의 화학적 결합을 이끌어내 팀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한 일이다.
당부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한국 국민들이 인내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새 감독이 지휘봉을 잡게 되면 새로운 팀을 구성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팀을 구성하고 새 기반을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한국팀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계속 훌륭한 팀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울러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새로운 선수를 발굴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뛰어보지 못한 선수는 경험을 얻을 수 없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선수든 팀이든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한국 선수들도 그동안 너무 열심히 뛰어줬다. 하지만 마지막 게임도 이겼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몇 분 동안 수비의 움직임이 맘에 안 들었다. 축구는 경기의 흐름을 타는 것이다. 처음에 허둥대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키다 리듬을 타다보면 골을 넣게 되고 훌륭한 경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터키와의 경기는 그런 면에서 안 좋았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한국팀의 경기에 대해 만족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전세계에 충격을 준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남미, 북미, 유럽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나에게 한국팀이 펼친 경기를 보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전화나 e메일을 보내왔다. 한국 사람들의 열띤 응원과 한국팀의 수준 높은 경기력에 놀랐다는 내용들이다. 나는 터키와의 경기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국팀의 공격적인 플레이를 즐겼다고 전해왔다.
가 한국팀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조금 경기가 안 풀릴 때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다. 그들은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싸웠다. 한국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시작한다. 한발짝 물러선 뒤에도 다시 시작한다. 한국팀도 그랬다.
내가 한국팀 감독을 맡으면서 생각한 건 미래였다. 그저 월드컵에 나가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 이상을 이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한국팀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팀이 다른 팀들과 다른 뭔가를 갖춘 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초 경쟁력을 키우게 되면 세계 어느 나라 팀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 특히 경기를 하다보면 힘들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어야한다. 그러려면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한다.
월드컵 4강 성적보다도 내가 더 뿌듯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이런 면에서 거둔 성과들이다. 이제 한국 선수들은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주눅들지 않는다. 평소 하던 대로 개인의 역량을 모두 펼쳐 보이며 멋진 경기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됐다. 상대를 존경하되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바로 한국축구의 미래다.
간혹 주위 친구들이 한국에 온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지금 나는 아무런 후회도 없다. 오히려 행복하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한국팀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이것은 나의 축구인생에서 매우 기억에 남는 성과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매우 유용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국에 와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준 우정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