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에서 본 외국 이민에 관한 프로그램에서, 멀고 먼 타국에서 고생하는 이민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자녀교육을 위하여 어려움을 참는다고 말하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이기에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부모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나라로 이민을 떠나야 하나. 몇 년 전 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자퇴하는 사태를 보고 우수한 학생들을 공교육에서 몰아내는 제도의 불합리성에 개탄을 금치 못했지만 이제는 자녀 교육을 위해 가족들이 생이별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교육제도가 정보화시대에 필요한 창의력을 키워주고 있는 것도 아니며, 사교육비를 줄이거나 빈부의 세습을 방지하는 데 성공한 것도 아님은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여러 문제가 드러났으면 책임 있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찾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사태는 교육 당국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한심한 사건은 자립형 사립고 시범 운영을 둘러싼 교육부와 서울시 교육청 사이의 갈등이다. 자립형 사립고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교육개혁위원회에서 처음 제안되었고 현 정부의 새교육공동체위원회에서 계속 논의돼 대통령 보고를 통해 2002년부터 시범 운영하도록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그런데 서울시 교육감이 중3병의 부활과 과외열풍이 몰려올 것이라며 서울에서는 자립형 사립고의 추천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시범운영의 정상적 시행이 어려움에 빠졌다.
그러나 무릇 시범 운영의 목적은 제도의 장점과 부작용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므로 한 개인의 판단으로 그 결과를 미리 예단하며 시범 운영 자체를 막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시범 운영을 통해 제도의 장단점을 미리 살펴보기보다 교조적 확신을 가지고 바로 전면 시행에 돌입한 과거의 행태가 교육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의 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현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개선책은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선거에서는 자립형 사립고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교육감이 뚜렷한 이유 없이 말을 바꿔 시범 시행을 막고 있으니 국가의 백년대계를 책임져야 하는 교육현장도 이제는 약속은 무시하고 투표권자의 눈치만 살피는 정치판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또 다른 한심한 일은 초중고교의 학급당 학생수를 35명으로 낮추기 위해 앞으로 6개월 이내에 5220개의 교실을 새로 짓겠다는 교육부의 계획이다. 물론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는 것은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일이고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육 전문가들이 바라던 것은 교원도 충분히 충원되고 특별활동을 위한 공간도 적절히 마련된 상태에서의 학급당 학생수 축소이지 지금처럼 미술반과 강당을 없애면서 교실만 늘리는 마구잡이식 학급 증설은 아니었다. 게다가 무리하게 짧은 시한을 정해서 밀어붙이는 것은 마치 고지를 점령하는 군대식 사고방식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고지를 점령하더라도 지킬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교육투자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어우러져야 제대로 효과가 나타나는 법인데 증설된 학급을 가르칠 교사의 충원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교실만 늘려 짓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과만 챙기겠다는 대표적 전시행정이다. 이 같은 교육당국의 허세를 용납할 만큼 한국의 교육현장이 여유로운지 이민가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보았으면 좋겠다.
사실 국내 교육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대해서는 과거 교육제도에 관여했거나 현재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책임을 느껴야 될 일이다. 제도의 장단점을 판단할 능력이 부족했거나, 무책임한 여론이나 국민정서에 편승했거나, 잘못된 소신으로 밀어붙였거나, 혹은 개인적 입신양명을 위해 문제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거나 모두 책임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아직도 정치적 이유나 전시효과를 위해 잘못된 정책을 밀고 나가는 교육행정가가 있으니, 앞으로도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국내 교육이 바로 설는지 암담할 뿐이다.
오 세 정(서울대 교수물리학, 본보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