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월드가)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

Posted November. 04, 2005 07:14   

中文

2일 모스크바 중심가 모호바야거리의 국립 모스크바대 내 한국학센터.

1991년부터 이 센터를 이끌고 있는 미하일 박(87한국사) 모스크바대 명예교수가 손녀 빅토리아(26) 씨와 삼국유사 원전(한문본)과 한글본을 놓고 토론 중이었다.

모스크바대에서 처음으로 한국사 전공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1949년부터 이 대학에 재직 중인 박 교수는 러시아 한국학의 대부로 꼽힌다.

발레리 수히닌 주한 러시아 공사와 알렉산드르 티모닌 러시아 외무부 부국장 등 러시아의 한국전문가들과 전현수(북한사) 경북대 교수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박 교수는 최근 삼국유사의 러시아어 번역을 시작했다. 1995년 완성한 삼국사기 번역에 이은 도전이다.

그만 쉬시지 어려운 일을 왜 다시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일을 손에서 놓지 않겠다. 내가 못 마치면 이 아이가 있지 않느냐며 손녀를 가리켰다. 삼국사기 번역은 홀로 하느라 36년이 걸렸으나 이번에는 빅토리아 씨가 함께 해 훨씬 든든하다는 것.

빅토리아 씨는 올해 8월 서울대 대학원에서 송기호() 교수의 지도 아래 발해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출산을 위해 박사 과정 진학을 잠시 미루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빅토리아 씨는 3개월 된 딸을 돌보면서 삼국유사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박 교수는 연구를 물려줄 후계자가 생겨 안심이 된다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박 교수 집안은 러시아에서도 수재 가문으로 유명하다. 2명의 아들과 3명의 손자가 모두 러시아 최고 명문인 모스크바대와 모스크바국제관계대(MGIMO), 미국 시카고대, 영국 런던대경영대학원(LBS)을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 금융계와 기업에 몸담고 있다. 유일하게 학자가 된 사람은 맏아들이자 빅토리아 씨의 아버지인 빅토르(60) 씨로 역시 모스크바대 아랍어과 교수다.

박 교수는 후손 중 누구도 자신이 일생을 바친 한국학 연구를 대물림하려 하지 않아 내심 섭섭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박 교수의 마음을 읽은 듯 빅토리아 씨는 1997년 모스크바대 동양사학과 1학년 때 한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후 한국사를 전공하겠다고 결심했다.

빅토리아 씨는 2002년 학부를 마치자마자 같은 과 동기인 남편 올레크 피로젠코(26) 씨와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고려사 관련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피로젠코 씨는 러시아 외무부 한국과에 근무하고 있다. 빅토리아 씨는 외교관인 남편이 한국 근무를 떠나게 되면 다시 서울에서 박사과정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빅토리아 씨가 발해사를 선택한 것은 할아버지와의 인연 때문이다. 박 교수가 태어난 프리모레 지방(연해주)의 크라스키노 인근에 발해 유적이 있었던 것. 어려서부터 발해 이야기를 듣고 커온 빅토리아 씨는 몇 년 전 박 교수와 함께 이곳을 답사하기도 했다.

요즘 러시아에서 발해사 연구가 부쩍 활발해졌어요. 발해가 한반도와 러시아 중국에 걸쳐 있는 만큼 남북한과 러시아 중국의 공동연구가 필요합니다.

빅토리아 씨는 논문을 쓰면서 북한 자료도 많이 참고했으나 북한의 사학 연구에는 객관성이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요즘 손녀 때문에 힘을 얻은 듯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 모스크바대 역사학보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동북공정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중국 정부와 중국 역사학계가 정치적인 의도 때문에 뭔가를 혼동하고 있다며 어떤 연구든 과학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기현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