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오피니언] 판사 성적표

Posted February. 03, 2005 22:58   

中文

5명의 판사가 있다. 근무 성적을 알아보니 A를 받은 판사가 1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B나 C, D, E를 받았다고 한다. 소송인으로선 가능하면 A를 받은 판사가 사건을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운이 없었던지 최하위 등급인 E를 받은 판사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다 같은 판사인데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자위해 보지만 마음 한구석이 영 개운치 않다. 같은 값이면 A를 받은 판사에게 재판을 받게 됐더라면 하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앞으로 법원을 찾는 사람들은 이런 일로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판사들의 성적표가 처음 공개됐기 때문이다. 물론 성적이 외부에 공개되는 것은 아니어서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 한 일반인이 담당 판사의 성적을 알 길은 없다. 평가등급이 판사로서의 능력과 반드시 직결되는 것도 아니므로 공연한 걱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상상은 판사 성적표가 법원에 몰고 올 변화의 바람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판사 성적표는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 수료 성적이 나쁘면 아무리 유능한 법관도 승진에서 누락되고 평생 한직을 전전해야 했던 서열제의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한 법관 근무평가제에 따른 것이다. 서열제의 폐해가 오죽 심했으면 판사들은 등산 갈 때 걸어가는 순서도 서열순이라는 자조()의 말까지 나왔겠는가. 근무평가제가 잘만 운영되면 법원 인사도 능력 위주가 될 터이니 일 잘하는 판사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다른 쪽에선 볼멘소리도 나온다. 평가등급을 잘 받으려고 윗사람 눈치를 보게 되면 외부의 청탁과 압력에 그만큼 쉽게 굴복하게 돼 법관의 독립성을 크게 해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법관을 점수의 노예로 만들 것, 처세에 능한 판사들에게만 유리할 것이란 지적도 있다. 법원만 변화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그 원칙 또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이 재 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