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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에서 본 한국

Posted March. 26, 2014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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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는 이런 유머가 있다고 한다. 경찰은 영국인이고, 애인은 프랑스인이고, 요리사는 이탈리아인이고, 기계를 다루는 사람은 독일인이고, 이 전체를 조정하는 사람이 스위스인이면 유럽은 천국이 된단다. 하지만 경찰은 독일인이고, 애인은 스위스인이고, 요리사는 영국인이고, 기계를 프랑스인이 다루고, 이 전체를 이탈리아인이 조정하면 유럽은 지옥이 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주재 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들은 얘기다. 유럽에서는 누구나 공감하는 유머란다. 동북아의 오랜 이웃 한중일 국민을 비교한 유머도 많다. 세 나라 사람이 외계인을 만났다. 중국인이 물었다. 너희에게 역사가 있느냐. 일본인이 물었다. 너희에게 예절이 있느냐. 이어 한국인이 물었다. 너희가 한국을 아느냐.

유머는 유머일 뿐이다. 그런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이 유머가 폐부를 찌른다.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는 24일 짬을 내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열사가 헤이그에 머물 때 묵었던 더 용(De Jong) 호텔 자리에 있다. 2층 마룻바닥은 당시 나무 마루 그대로다. 140여 년 된 마룻바닥은 곳곳이 썩고 파여 삐거덕댔다. 48세 이준은 그곳을 걷고 또 걸으며 누구도 알지 못하는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느라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은 허울뿐인 국가였다. 이준은 1907년 헤이그에서 44개국 대표들이 모여 세계 평화를 논의하는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고종 황제의 특명을 받아 헤이그로 향했다. 서울을 떠나 65일 만에 헤이그에 도착한 그를 맞은 것은 열강의 냉대와 문전박대였다. 초청국 명단 12번째에 코레(Coree)가 분명히 있었지만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회의장 밖에서 연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자 평화회의보는 축제 때의 해골이란 제목으로 이준 일행을 보도했다.

헤이그에 온 지 19일 만에 이준은 호텔에서 순직한다. 그의 사인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병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는 게 이준 열사 기념관 송창주 관장의 설명이다. 이준은 죽어서도 기구했다. 숨진 지 53일 만에 동행한 이상설이 102달러 75센트를 내고서야 인근 시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로부터 56년 만인 1963년 10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송 관장은 이번 핵안보정상회의가 3차 만국평화회의라며 감격스러워했다. 황제의 특사는 회의장 밖에서 해골이 됐지만 그가 숨진 지 107년 뒤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는 3차 만국평화회의에서 개막연설을 했다.

열사의 원혼이 서린 그곳에서 26일 새벽(한국 시간) 한일 정상이 만났다. 그 역사적 만남에 감격보다는 서글픔이 앞섰다. 한 세기가 지났건만 일본은 변한 게 없다. 한국은 둘로 갈렸다. 이준 열사가 여전히 묻고 있다. 너희가 한국의 현실을 아느냐. 그곳에 평화가 있느냐.헤이그에서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