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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황성옛터

Posted April. 02, 200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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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는 신파극이 대중 오락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연극을 보고 돌아가야 서울을 제대로 구경한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공연은 종합선물 세트로 구성됐다. 희극 한 편, 비극 한 편에 막간 연극이 곁들여졌고 중간에 여배우가 나와 노래도 불렀다. 아직 유행가라는 개념도 없던 1930년 서울 종로에 위치한 단성사 무대에 앳된 모습의 이애리수가 사뿐히 걸어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3절로 이뤄진 노래가 애조를 띠고 퍼져나가자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발을 굴렀다. 노래는 입소문을 타면서 1932년 황성의 적()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레코드로 취입됐다.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옛터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로는 경이적인 5만 장의 레코드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니 반응이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일제가 조선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노래를 금지시켰지만, 취입 당시 22세이던 이애리수는 민족의 연인으로 불리며 일약 스타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기 가수였다.

이 곡은 전수린 씨가 개성의 고려왕궁 터를 한밤중에 찾아가 얻은 착상()으로 작곡했다. 폐허로 변해버린 왕궁 터에는 달빛만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영화를 누렸던 옛날과 비교해 회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내린 비를 보며 악상이 떠올라 작곡을 했다고 회고했다. 작사는 극작가와 배우로도 이름을 날렸던 왕평이 했다.

애리수는 서양 이름인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9세 때부터 연극 무대에 섰던 그는 황성옛터 이후 절정의 인기를 누리다 1930년대 중반 종적을 감췄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자살을 두 번 시도했다. 나이를 감안하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됐던 그가 경기도의 한 요양시설에서 살고 있음이 알려진 건 지난해였다. 그가 그제 99세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한을 달래줬던 스타 예술가를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에게서 대중문화 여명기의 생생한 소리를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했던 것도 못내 아쉽다.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