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오피니언] 황태자의 자랑

Posted August. 13, 2005 03:06,   

ENGLISH

1980년 8월 초 어느 날. 당시 서울 서소문에 있던 대법원 청사 2층 대법원장실에 한 대법원판사(현재의 대법관)가 들어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사표를 내밀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커피 잔을 들긴 했으나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하고 커피를 옷에 줄줄 흘렸다. 그는 자신의 이런 행동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훗날 당시 대법원장이 들려준 양병호 전 대법원판사의 기막힌 이야기다.

양 전 대법원판사는 사표를 내기 직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사흘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에 대한 상고심에서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낸 게 화근이었다. 1212쿠데타로 권력을 거머쥔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을 앞두고 사법부를 장악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첫 희생자가 3월 세상을 뜬 양 전 대법원판사였다. 총이 곧 법인 세상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사법부()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정치적 독립은커녕 법 논리로 정치 논리를 뒷받침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행정부의 한 부서라는 뜻인 사법부()도 모자라 사법부()라는 별칭을 얻었을까. 신군부의 외압에 심한 마음고생을 하다가 1981년 4월 중도 퇴진한 이영섭 전 대법원장은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퇴임사를 남겼다.

검사를 하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합류해 신군부의 집권을 도모했고, 노태우 정권에선 황태자로 통했던 박철언 씨가 1981년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법원장 후보들 면접시험을 봤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어느 후보는 대임()이 주어지면 판사들이 정부에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부끄러운 사법부 역사의 또 다른 단면이다. 박 씨는 무슨 자랑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초법적으로 사법부를 쥐고 흔든 역사적 책임을 그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송 대 근 논설위원 dk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