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내소사.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 속 그림이던 그 설경. 400m나 이어지는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지날 때마다 꾸었던 꿈속 풍경이다. 그 꿈, 그 상상이 실제로 나타난 지금. 눈앞에 펼쳐진 그 풍경으로 황홀해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펼쳐지는 키 30m의 육중한 전나무 숲길. 한여름이나 한겨울 이 숲에서 하늘 못 보기는 마찬가지다. 어찌나 울창한지 대낮에도 어둡다. 그런데 눈 온 뒤에 가보니 그 숲 속에 눈이 쌓였다. 나풀나풀 가지 피해 살포시 내려앉은 눈이다. 쌓인 눈 두께가 숲 밖이나 진배없다. 하늘 가린 숲에는 눈도 못 내릴 것 같았는데 그 숲이 아무리 우거져도 내리는 눈을 막지 못함이니 세상 순리 그르칠 일은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내변산의 관음봉(해발 433m). 그 아래 기암을 병풍 삼아 선녀 옷자락 걸치듯 살포시 내려앉은 1000년 고찰 내소사. 그 고운 자태 보려고 절을 찾건만 일주문 격인 전나무 숲을 수백m나 걸어 나와도 당우는 보이지 않는다. 기껏 본 것이 서너 계단 높이의 축석 위에 세운 천왕문. 사천왕상의 호위를 받으며 그 문을 통과하니 비로소 내소사 속내가 드러난다.
당우로 둘러싸인 절 안마당. 키가 20m나 되는 천살배기 느티나무가 손님을 맞는다. 백제 때 창건(633년)됐다니 연륜만큼은 이 절터에 못 미칠 터. 그래도 부안 땅 변산에서 속절없이 흘러버린 천년 세월의 거친 풍파를 아는 이는 이뿐이니 그 유구함과 굳건함에 고개 숙인다.
겨울 끝자락의 내소사. 한낮인데도 적막하리만큼 고요하다. 들리나니 산새 울음과 풍경 소리. 정적만이 감돈다. 어찌나 조용한지 지금 목탁 두드리면 그 소리 변산 바다까지 퍼져나갈 것 같다. 눈 밝은 이는 눈밭에서도 꽃을 본다. 법당문 창호에 핀 꽃살(꽃무늬 문살)이다.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꽃살문이지만 내소사 대웅보전 것은 좀더 특별하다. 정면 여덟짝 문의 창호가 온통 우아한 꽃무늬 문살로 가득하다.
주봉 의상봉(해발 509m)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악이 칠산 앞바다로 돌출한 지형, 변산. 산과 바다를 두루 갖춘 반도라지만 그 내외()가 분명한 게 또한 변산이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서로 양보 못할 진경을 양방이 두루 갖췄음이다. 한여름의 송풍회우(소나무 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와 전나무 가지에 빗방울 스치는 소리), 한겨울의 동조백화(겨울 아침 문을 여니 간밤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게 됨). 이것을 내변산의 제격이라 한다면 사철 다름없던 소사모종(낙조 드리운 포구를 향해 만선 깃발 나부끼며 들어오는 황포돛배와 이 즈음 은은히 울려 퍼지는 내소사의 대북 소리가 두루 어울린 풍요로운 바다 풍경)은 외변산의 제격 풍광이다.
절을 나와 외변산의 바다로 향한다. 반도 땅 끝에서 시작되는 변산 바다. 그 바다 역시 소리가 없다. 너른 개펄이 모두 집어삼킨 듯 무덤덤하고 조용하다. 거친 파도 들락거리는 동해에 비하면 이곳 바다는 호수다.
변산 해안은 산 바다, 내외의 두 변산이 만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해안선은 부산스럽다 할 만큼 들어가고 나옴이 복잡하다. 그런 해안을 섭렵하는 30번국도. 구불거림이 유려하다. 핸들을 돌릴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바다. 물 나가고 갯벌 드러나니 전혀 다른 바다로 모습이 바뀐다. 수평선 아래 지평선 거느린 특별한 바다. 거대한 제방에 의해 두개로 쪼개진 불쌍한 바다이기도 하다.
변산반도의 노른자라 할 격포항. 노란 깃발이 방파제에 줄지어 나부낀다. 바다 쪽의 방파제 끝 등대에도 걸려 있다. 위도 방폐장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의 마음이다. 채석강이 그 방파제와 나란히 서 있다. 켜켜이 쌓인 서책더미 모습의 붉은 바위벽. 회백색 콘크리트 구조물과 대비된 부조화는 자연 파괴의 극치다. 채석강 망친 방파제 들어설 때 주민들의 마음은 무슨 색 깃발이었을까.
그 옆 언포마을로 들어선다. 해변에 축석 쌓고 그 위에 소나무 심어 모양낸 모습이 어설프다. 교원을 위한 시설이라고 이름마저 상록해수욕장이라고 바꿨다. 1년에 한 달밖에 못쓸해수욕장인데도. 오히려 그 옆 궁항의 포구마을(격포리)이 훨씬 정겹다. 파도에 들먹여 뱃머리 부딪는 고깃배가 올망졸망 붙들려 있는 자그만 포구. 그 물가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인 지붕 낮은 낡은 집들. 담벼락에 예쁘게 그린 방폐장 반대 구호와 그림도 낯설지 않다.
변산을 떠나며 바람 하나를 갖는다. 정겨운 이 풍경 오래도록 변치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다. 또 하나. 바다와 산의 충돌적인 만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관용의 자연 변산에서 두루 잘사는 지혜 얻기를, 그래서 찾는 이 누구나 예서 그 미덕 배우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