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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번홀 환상의 웨지샷 우승 확신

Posted May. 07, 200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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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석 같은 표정으로 경기에만 집중하던 그도 역시 여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격스러운 우승이 확정된 뒤 눈가에는 물기가 비쳤고 인터뷰할 때는 애써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낯선 이역만리에서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 속을 까맣게 태운 아내 김현정씨(31)와 포옹을 하면서 비로소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나흘 간의 힘겨운 여정 속에 최경주(32슈페리어)가 최후의 승자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전설의 골퍼 개리 플레이어가 연습을 많이 할수록 더욱 운이 따른다고 말했듯이 최경주가 그랬다. 걸음마를 떼면서 클럽을 잡았다는 선수들이 수두룩한 필드에서 고등학교 때 골프를 시작한 최경주는 말 그대로 늦깎이였다. 짧은 구력의 핸디캡을 만회하며 남보다 앞서려면 더욱 땀을 흘려야 했던 것이었다.

이날 최경주는 그동안 쏟아 부은 노력에 행운까지 곁들여지면서 정상을 향한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었다. 1타차 단독선두로 마지막 라운드에 들어간 최경주의 샷은 의도한 대로 척척 떨어졌고 그를 쫓던 추격자들은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6번홀(파5)에서 공동선두를 허용한 뒤 7번홀(파4) 버디로 다시 단독선두에 나선 최경주는 11번홀(파5)에서 2위 그룹을 2타차로 제치며 승기를 잡았다. 2온을 노린 세컨드샷이 그린을 넘어 러프에 빠진 뒤 3번째 러닝 칩샷을 컵 6m 지점에 떨어뜨려 회심의 버디 퍼팅을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 라인을 타고 흘러가던 공은 그대로 컵에 빨려 들어갔고 최경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 최경주를 1타차로 쫓던 브라이스 몰더(미국)는 10번홀에서 뭔가에 홀린 듯 무려 4퍼트로 홀아웃, 트리플보기로 무너져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승부가 완전히 갈린 것은 최경주 자신도 터닝 포인트라고 밝힌 16번홀(파4). 16언더파로 단독 2위 조프 오길비(호주)에 2타 앞선 채 티잉그라운드에 올라 페어웨이가 좁은데도 과감하게 드라이버를 빼들었고 318야드를 날려 페어웨이에 안착시켰다. 핀까지 124야드를 남기고 피칭웨지로 그린을 공략, 핀 5m 지점에 떨어진 공은 때굴때굴 구르더니 컵 오른편에 3분의 1 정도 걸려 멈춰 이글을 놓쳤다. 가볍게 버디를 추가한 최경주는 17언더파로 달아나며 승리를 굳혔다. 최경주가 안정된 드라이버샷과 정교한 아이언샷, 퍼팅으로 위력을 떨치는 사이 그와 챔피언조로 싸웠던 몰더는 기라도 죽은 듯 3오버파로 맥을 못 추었다. 또 경기 초반 최경주를 위협했던 마이크 스포사(미국) 역시 11번홀(파5)에서 이글 퍼팅과 짧은 버디 퍼팅을 잇달아 놓쳐 공동 선두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날 날씨도 그를 도왔다. 섭씨 33도의 찌는 듯한 무더위가 출전선수들의 힘을 빼놨으나 한여름 완도 모래밭을 뛰어다녔던 최경주는 오히려 더운 날씨에 힘을 내는 체질이었다.

마지막 챔피언 퍼팅을 마친 뒤 최경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라도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종석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