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헌절 53주년 맞는 우리의 다짐
헌법제정 쉰 세 돌을 맞이하는 우리의 심정은 나라와 겨레의 앞날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 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헌법제정의 기본정신, 곧 제헌정신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제헌정신은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동전의 양면을 형성하는 이 한 쌍의 이념체계만이 우리 겨레를 평화롭고 창조적이며 풍요한 밝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헌정신에 비추어 지난 반세기 남짓한 헌정사를 돌이켜 볼 때 부끄럽고 불행했던 일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권위주의체제에 맞서 투쟁한 민주주의 표방세력을 중심으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을 때 기대를 걸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대가 어긋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은 무엇인가. 제헌과정에서 이미 분명히 지적됐듯이, 그것은 우선 권력분립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지난날의 권위주의 정권 때와 별반 차이없이 대통령 한 사람의 발상과 발언과 지시가 국정전반을 지배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오죽하면 현 공동정권의 한 축인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가 전제적() 대통령으로까지 표현했을까.
자유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기둥은 법치주의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지난날의 권위주의 정권 때에 못지않게 법의 선별적 집행, 심지어 자의적 해석에 따른 보복적 집행이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현 집권당의 최고위원 한 사람이 국세청에 불려가 탈세범이 안 되는 국민 없고 검찰청에 불려가 범법자가 안 되는 국민 없다고 개탄할 정도로 법을 앞세운 인치()가 벌어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또 하나의 기둥은 제도를 통한 국가경영이다. 그러나 특히 이 정부 아래 벌어지고 있는 두드러진 현상은 각본에 따른 듯한 여론몰이를 앞세워 제도권을 압박하는 군중노선의 정치행태이다. 의회와 정당, 그리고 사법부 등 국가제도를 통한 갈등의 해소방식을 벗어난 군중투쟁의 방식으로, 더구나 권력의 영향 아래 있는 기관들을 통한 일방적 여론재판의 방식으로 권력의 눈에 밉보인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몰아세우게 함으로써 사회를 조각 내 서로 싸우게 만드는 방식은 지난날 공산주의사회에서 잦았던 불법적 탈권투쟁방식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자유민주주의의 생명은 언론의 자유이다. 우리는 이 정부 아래 언론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고 거듭 말한다. 물론 언론사들에도 잘못이 있었다. 본사도 그 점에 대해 반성하고 국민 앞에 사과함과 아울러 법의 요구에 응할 것은 응하기로 결정하면서 스스로 고칠 것은 고쳐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와 집권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사들의 약점을 잡고, 그것에 법을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가운데 과대포장해 발표하고, 다시 인사나 재정에서 정부의 직접적 통제 아래 있는 언론사들이나, 군중노선을 신봉하는 일부 운동권 단체들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매도하게 하는 행태는 확실히 반민주적 억압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시장경제원리와 짝을 함께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점은 김대중() 대통령 스스로 수없이 강조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기업인들, 금융인들, 경제인들은 이 소중한 원리가 깨어졌다고 걱정한다. 관치금융은 여전하고, 어설픈 사회주의적 발상에 따른 국가재정으로 퍼주기 또는 메워주기 방식으로 경제정책이 운용되고 있다.
확실히 제헌정신은 이 정부 들어서서 시련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집권당에 연관된 한 연구소가 통일헌법을 연구하고 있음은 국민을 긴장하게 만든다. 긴 눈으로 볼 때, 통일헌법의 준비는 필요하나, 제헌정신이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고 제대로 살리는 일이 더 시급하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근본적으로 굴절시키는 방향에서 통일헌법이 연구된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경고해 둔다.
오늘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21세기에 들어서서 처음 맞는 제헌절이다. 새 세기 이 겨레 이 나라의 장래가 제헌정신의 수호와 발양에 달렸다고 믿는 우리는 제헌정신에서 이탈하는 세력, 심지어 제헌정신을 훼손시키는 세력에 맞서 과감히 싸울 것임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