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당시 동아일보에는 상호와 업주 이름을 내는 정도의 안내광고가 주류를 이뤘다.
‘연초제조업 ○○상점’ 하는 식이었다. 한약과 약방 광고가 많았고 피혁원료 곡물 등의 수출관련 광고도 자주 눈에 띄었다. 상품 광고는 제약과 구두가 압도적이었다. 광고는 문자 위주에서 서서히 커리커처나 사진 등 비주얼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변모했다. 동아일보 창간을 축하하는 광고는 전국 각지에서 쇄도했다.
일반기업은 물론 종교계와 문화계, 학계 등이 망라됐고 사회 저명인사들은 개인명의의 광고를 내기도 했다. 초창기 광고가 지면에서 차지하는 면적대비 비중(광고점유율)은 간혹 40%를 육박하기도 했으나 통상 30% 내외에 불과했다. 광고 단가는 5호 활자 14자 1행에 1원. 당시 신문사의 수익은 광고보다는 판매에 의존했다.
1기 결산 결과 전체 신문사 수입의 65%는 판매수익이었으며 광고수익의 비중은 32%였다. 영업조직도 영업국장이 광고부와 판매부를 관장하는 1국 2부 체제로 출발했다. 동아일보 광고의 카피와 모양은 그때 그때의 시대상을 반영했다. 창간 20주년을 맞은 40년. 당시 신문에는 성병광고가 심심찮게 게재됐다. ‘성병의 발호는 국민의 수치다. 신시대의 치료는 신예의 무기로. 성병을 구축하시오.’ 3단통으로 크게 게재된 이 약 광고는 계몽적인 카피와 군사적 명령어투를 사용해 군국주의 막바지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광고와 압력

수익구조에서 광고의 비중은 50년대까지 판매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동족상잔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53년의 경우 판매 대 광고의 수익비중은 85% 대 14%로 판매 쪽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60년대 후반들어 근대화가 시작되고 기업활동이 늘어나면서 광고가 신문사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덩달아 증가했다. 자연히 편집권에 대한 광고주의 압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이 점을 악용해 광고를 언론탄압 혹은 영향력 행사 수단으로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69년 10월14일 게재된 유신헌법 지지 전면광고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재향군인회 등 법적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된 단체를 내세워 각 신문의 한 면을 통째로 사 유신헌법 개헌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광고를 게재했다. 당연히 일반 광고에 비해 비싼 값이었다. 일부 신문사는 이 광고를 얻기 위해 ‘운동’ 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앙정보부의 광고가 신문기사와 똑같은 형태의 ‘기사식 광고’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독자들에게 ‘동아일보마저 유신헌법을 지지하는구나.’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컸다. 그래서 편집진은 이 광고를 몇 차례 거부했다. 승강이 끝에 결국 국민투표 3일 전 중앙정보부의 광고가 게재됐다.
그러나 광고원고를 받아본 편집진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고가 신문 편집과 너무나 유사하게 제작된 데다 하단 3단은 금성사의 광고까지 붙여 ‘진짜 기사’처럼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편집진은 이례적으로 1면에 기사 인덱스를 게재하면서 ‘6면은 전면광고임’ 이라고 명시하고 해당면 상단에는 전면광고라는 글자를 명확히 해 독자의 오해를 막았다. 주요기사를 안내하는 인덱스에 광고임을 안내한 것은 이례적이면서도 기발한 발상이었다.
이후 동아일보는 광고를 둘러싸고 독재정권과 또 한 차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였다. 세계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고탄압사건이 그것이다. 광고가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된 것은 그만큼 광고가 신문 수익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69년 45기 결산 결과 전체 수익에서 판매와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34% 대 33%였으나 70년 46기 결산에서는 30% 대 37%로 역전됐다. 광고의 비중이 그만큼 커졌고 이것은 광고수익에 신문사가 의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74년 12월16일 광고를 게재할 예정이던 일부 광고주들이 ‘광고를 빼달라.’고 요청해오면서 광고탄압사태가 시작됐다. 신동아, 여성동아는 물론 동아방송의 광고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광고가 빠지기 시작한 지 10일 뒤 동아일보는 광고사태를 처음 보도했다.
한 달 사이 상품광고의 98%가 중단되는 심각한 상황이 이어졌고 멀고 험한 언론자유 수호투쟁이 시작됐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이 사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 언론탄압 사실을 은폐했고 박준규 공화당정책위원장은 정부의 개입 개연성을 내비쳤다가 황급히 발언을 번복하기도 했다. 74년 12월부터 75년 7월까지 장장 212일에 걸쳐 벌어진 광고탄압. 그러나 국민의 성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배운대로 실행 못하는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하나이다.’
‘동아야 너마저 무릎 꿇으면 진짜 이민 갈 거야’
‘먼 훗날 내 아들이 나에게 1975년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새마을 운동보다는 자유언론 수호운동에 앞장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겠다.’
‘벼랑에 핀 꽃 고난을 이기고 … 동아 만만세’
74년 겨울 세계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고탄압을 받기 시작한 동아일보에 시민의 격려가 쏟아졌다. 생존을 위한 굴복이냐 자유언론 수호냐를 선택해야 하는 절박한 갈림길. 그러나 동아일보는 끝내 자유언론을 지켜냈다. 그 버팀목은 다름 아닌 온 국민의 격려와 성원이었다.
동아일보에 있어 광고의 의미는 그래서 남다르다. 단순히 영업의 의미라기보다는 언론자유수호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피눈물나는 동아의 언론자유 수호투쟁에 대해 국제신문발행인협회는 언론자유 금펜을 수여했고 이는 한국 언론의 위대한 자부심으로 기록되고 있다.
80년대 80년대로 들어서면서 광고시장에는 큰 변화가 일었다. 80년 1600달러였던 국민1인당 GNP가 83년 2000달러, 89년 5000달러로 급증했고 95년에는 1만 달러를 돌파했다. 소득상승에 따라 광고시장이 급변한 것은 당연했다. 80년대 중반 이미 광고비는 GNP대비 1%를 상회하기 시작했다. 80년 늦가을 수출의 날 기념식을 계기로 TV컬러방송이 시작되었고 81년 봄 모든 TV광고가 앞다퉈 컬러화했다.
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광고사에 분기점이 됐다. 88년 한 해의 광고시장 규모는 1조 원을 돌파하는 폭발적 증가세를 보였다. 광고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자연스럽게 신문도 증면했다. 95년 국내 총 광고비는 5조 원을 넘어서 세계 10위권의 광고시장을 형성했다. 광고수익은 판매수익을 크게 앞질렀고 신문사의 주수입원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와 관련,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권 차원의 언론탄압이 크게 줄어든 반면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광고주의 압력이 증대하고 있다고 시민단체가 지적하기 시작했다. 신문의 증면, 조간체제 전환, 가로쓰기와 섹션의 도입 등 변화를 거듭하면서 광고매출액은 증가세를 지속했다.
90년대 그러나 상승곡선을 그리던 광고수익은, 우리나라가 국가부도로 비유되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하에 든 이후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97년에 비해 98년 광고매출 총액은 30% 가까이 감소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99년에 들어서면서 광고시장은 활기를 찾았고 97년 매출수준을 빠르게 회복했다. 99년 11월 현재 신문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한 면적(광고점유율)은 50∼53%. 98년 결산결과 신문사 수입에서 광고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8%로 판매수익 19.3%에 비해 4배를 웃돌았다.
90년대 후반 인터넷의 빠른 확산과 영상매체의 영향력 확대 등으로 전체 광고시장에서 신문광고가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한 도전에 직면했다. 인터넷 등의 광고시장은 이제 막 맹아단계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뉴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광고시장은 21세기 들어서면서 더욱 빨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인쇄매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99년 말부터는 광고접수에서 예약 수금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신정보시스템을 가동해 광고주에 대한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있다. 약 3만에 달하는 광고주의 업종 법인번호 총게재액 등 정보가 입력, 관리되고 있으며 1만 여 주요 광고주에 대해서는 광고담당 임원 및 회사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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