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특별기고

다시보는 동아일보, 동아 사람들

..................................................................................유재천(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동아일보의 80년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기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신문으로서 지난 80년의 역사를 기록해주었다는 뜻에서만 아니라 동아일보가 걸어온 길이 우리 현대사의 부침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창간 이후 동아일보가 걸어온 영광과 좌절, 저항과 순응, 그리고 거듭나기 위한 고뇌가 모두 그러하다. 이런 과정에 동아일보 독자들 또한 열광과 분노, 희망과 절망, 그러나 저버릴 수 없는 기대와 같은 감회를 맛보았을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신문을 구독해온 독자층이 두터운 동아일보이기에 그와 같은 독자들의 반응은 각별한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 역시 그러한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내가 동아일보를 읽기 시작한 것은 부산 피란시절 중학생 때부터였다. 선친께서 동아일보의 애독자였기 때문이다. 그 영향을 받아 동아일보의 독자가 된 지 50여 년이 되었다. 환도 후 서울에 와 하숙하며 어렵게 공부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동아일보만은 한번도 끊지 않고 구독해 열심히 읽었다. 신문을 3년만 열심히 읽으면 대학을 졸업한 사람 못지 않게 세상 물정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 선친의 뜻을 따른 셈이다. 동아일보는 그 때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촌철살인의 「壇上壇下」를 읽던 쾌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시국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던 동아일보와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며 독재와 부패에 대해 증오하고 정치가 달라져야만 나라가 제대로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 당시 동아일보 독자라면 누구나 같았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그만큼 국민들의 염원을 대변하고 변혁의 여론을 선도했다. 4·19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그 당시 신문들이 전개한 반독재투쟁의 귀결일 것이다. 일제식민통치하에서 싹텄던 동아일보의 저항 이미지는 이 때 결정적으로 정형화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당정권 몰락 이후 동아일보가 감당해온 반독재투쟁과 자유언론실천운동도 그 전통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구실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의 존재이유이기도 했다. 저항과 비판의 이미지는 동아일보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로 자리잡으면서 한편으로는 지지와 격려로 작용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실망과 좌절로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언론 전반이 배제당했던 유신체제와 전두환정권시대는 예외로 하더라도 동아일보 독자들의 그와 같은 기대는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와 나의 관계는 여느 독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언론을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공탓에 여러 동아일보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언론현장을 이해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언론인으로서 갖는 사명감, 사회적 책임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75년 동아광고탄압사태 당시 언론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동아와 뜻을 같이하는 11인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이 격려광고와 약소한 광고비를 모아 동아일보 송건호 편집국장과 홍승면 주필을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따로 만났지만 우리 말을 듣고 두 분은 한결같이 뜻은 고마우나 광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행여 광고로 인해 교수직에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우겨 광고를 싣고 그 날자 사회면에 중간 톱으로 기사화되기도 했다. 동아방송이 보도한 것은 물론이다. 이 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우리가 당할지 모를 고초를 먼저 걱정해주던 두 분의 배려에 우리는 감동했다. 불행한 해직사태로 회사를 떠난 동아투위돕기운동이 각계에서 일어났다. 언론자유수호투쟁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서강대 교수들의 헌금을 모아 동아투위 사무실을 찾아 권영자대표에게 헌금과 함께 헌금한 교수들의 명단을 전달한 일도 동아 사람들을 생각할 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남은 사람이나 떠난 사람이나 모두 동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상처를 더 깊게 만들었지만 대승적 견지에서 서로 명예롭게 화해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후배 기자들이 영예로운 선배들의 전통을 밝은 마음으로 이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겠기 때문이다.
78년 나는 동아일보사의 위촉을 받아 동아일보 독자와 동아방송 청취자들의 신문구독과 방송청취행태 및 의견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간부들에게 브리핑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소는 지금 동아미디어센터 자리에 있던 가건물 2층이었다. 가건물이었으니만큼 지붕도 양철이었다. 마침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오후 2시부터 무려 4시간 동안 그곳에서 브리핑을 하고 질의응답을 한 것이다. 에어컨도 없는 한증막 속에서 진행되다보니 모두 숨이 막혀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 긴소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정장을 하고 맨앞줄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4시간 내내 브리핑을 듣고 질문도 하던 一民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一民선생이 그렇게 진지하게 듣고 질문을 하니 다른 간부직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다. 이 밖에도 동아 사람들과 관련된 일화는 많다.
앞에 든 사례를 통해 동아 사람들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저런 기회에 동아일보가 마련한 좌담회에 여러번 나갔다. 몇 년 만에 좌담회에 나가보아도 여전히 구식 녹음기를 쓰고 있었다. 여기 저기 테이프를 붙인 상처투성이 녹음기가 바뀐 것을 안 때는 99년 10월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 25주년 기념좌담회 자리에서였다.
이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동아일보의 보수성을 말하고 싶어서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성은 편집정책의 이데올로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피상적인 관찰일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동안 보고 들은 동아일보 운용의 관행에 구태의연한 측면이 많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적인 평가지만 다른 신문사들에 비해 동아일보는 시대에 부응하는 혁신에 민첩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전통의 무게를 애써 힘겹게 견딘다고나 할까, 무척 구태의연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동아일보는 확실한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제2 창간선언’과 ‘종합미디어의 꿈’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그러하다.
동아일보 독자들도 많이 변했다. 그들은 이제까지 정형화했던 저항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동아일보의 비판기능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독자들은 ‘제2 창간선언’에서 밝힌 바 “이제 민주화시대가 전개되는 마당에 저항 기질만으로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고품격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 미디어’를 지향하는 동아일보의 목표가 새로운 시대 동아일보 독자들의 기대와 일치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동아일보는 또한 위성방송과 케이블TV사업에 진출할 것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쇄매체가 영상매체, 나아가 인터넷사업 등을 겸영하는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려는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종합 미디어의 꿈’을 실현함에 있어 간과해서는 안 될 핵심 과제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종합 미디어화는 자칫 경영의 상업성이라는 유혹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아일보사는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동아일보는 죽고 말 것이다. 따라서 종합 미디어의 꿈을 구현함에 있어 어디까지나 동아일보는 저널리즘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지향할 저널리즘의 성격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저널리즘은 앞으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옥석을 구분해주어야 하며, 동시에 현실 인식에 필요한 정보를 갖고 비판적 능력을 지닌 공중을 형성할 수 있게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언론이어야 하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미래는 이러한 저널리즘을 위한 예비를 얼마나 빠르고 성실하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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