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금강산이 울었다

Posted August. 27, 2005 03:01   

中文

26일 금강산에서 남북이 또다시 울었다. 피를 나눈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이산 반세기라는 세월의 골을 넘기에 충분했다.

31일까지 금강산에서 1, 2차로 나뉘어 진행되는 제1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26일 오후 3시 첫 단체 상봉을 시작으로 열렸다. 이번 상봉은 지난해 7월 10차 상봉에 이어 13개월 만에 재개된 것이며 1차 상봉단에는 국군포로 2가족이 포함됐다.

1차 상봉단에 포함된 남측 상봉자 99명 중에는 80세 이상이 50명, 90세 이상이 5명으로 절반 이상이 80대 이상 고령자들이다. 최고령자는 북쪽에 살고 있는 딸 3명을 만나는 최재선(97) 할아버지와 북의 손자손녀들을 만나는 박간남(97) 할머니다.

당초 1차 상봉자는 남과 북 각 100가족씩 모두 200가족이었으나 경기 군포시에 사는 전종원(73) 씨가 이날 오전 고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져 남측 상봉자가 99명으로 줄었다.

1차 이산상봉 행사는 26일부터 28일까지. 남측 100명이 재북 가족 235명을 상봉하고 29일부터 31일까지는 2차로 북측 100명이 재남 가족 435명을 만난다. 남북의 상봉자들은 1, 2차 각각 상봉 4회(단체, 개별, 삼일포 공동참관, 작별 상봉)와 공동 오찬 및 만찬 각 1회씩 가질 예정이다.

행사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대한적십자사 한완상() 총재와 북한적십자회 중앙회 장재언() 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착공식이 열린다.

1차 상봉에선 특히 국군포로 출신 두 가족의 애타는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오후 금강산호텔 2층 상봉장에서 남쪽의 막내 동생 정한현(69) 씨를 얼싸안은 진현(79) 씨는 긴 통곡으로 55년간의 사무친 그리움을 달랬다.

부모님은, 부모님은 어떻게 되셨나? 손을 부여잡고 애타게 묻는 형 진현 씨에게 한현 씨는 다 돌아 가셨다. 형님도 형수님도라며 울먹였다. 한현 씨의 흐느낌은 이내 오열로 바뀌었다.

1950년 7월 말 친구들과 함께 국군에 입대했던 진현 씨는 경북 영천 부근에서 주둔하던 중 부대원과 함께 인민군 포로가 돼 북행길에 오르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전사통지서도 날아왔지만 부모님은 총명했던 셋째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살아만 있어 준다면, 북측에라도 살아만 있어 준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하며 기다리던 부모님은 그러나 한을 풀지 못한 채 1970년과 1972년 각각 세상을 떠났다.

니 혼자 남았구나.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 내며 깊은 한숨을 내쉰 진헌 씨는 고향인 경주의 집 마당에서 햇볕 좋은 날 동생과 장기를 두던 일을 회상하면서 헤어질 때 어린 중학생이었던 네가 벌써 할아버지가 되었구나라며 동생의 얼굴을 매만졌다. 한현 씨는 벌써 50년이 흘렀잖아요라고 말했다.

비록 형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형님의 핏줄을 만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이날 국군포로 출신인 형 오현원(사망) 씨의 부인 홍재화(69) 씨와 아들 영철(39) 씨를 만난 현웅(62) 씨는 형수와 조카를 꼭 끌어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오 씨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조카지만 오늘 보니 눈매가 형님과 닮았다며 불과 1년 전 숨진 형을 그리워했다. 형이 숨진 날이 지난해 4월 21일이라는 사실도 오늘에야 형수의 전언을 통해서 알게 됐다.

7남매 중 맏아들인 현원 씨의 소식이 끊긴 것은 1950년 12월 20일경. 당시 20세의 나이로 군에 입대한 형은 서울 수복 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체념하고 있던 현웅 씨에게 그리운 형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49년의 세월이 흐른 1999년. 형 현원 씨가 남측 가족을 찾고 있다는 자막이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 나온 것을 보고 곧바로 대한적십자사에 문의한 결과 형의 생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현웅 씨는 즉각 상봉 신청을 했지만 다른 이산가족들보다 나이가 적은 탓에 상봉 기회는 6년이 지난 지금에야 찾아 왔고 그 사이 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상태였다.

현웅 씨는 자강도 만포시에 사는 형의 가족들에게 내복과 면장갑, 목도리 등을 전달하는 것으로 한을 달랬다.



하태원 taewon_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