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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수 아들 서울교구장 안될 말 연판장 아픔도 묻고

옹기장수 아들 서울교구장 안될 말 연판장 아픔도 묻고

Posted February. 18, 20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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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서 추기경을 처음 뵌 것은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서울대생 박종철 군 추모 미사 강론에서였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는 동아일보의 특종으로 610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추기경은 이날 강론에서 작심한 듯 군부독재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물은 것처럼 네 아들, 네 제자, 네 국민인 박종철 군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기사를 작성하면서 가슴이 쿵쿵 뛰었고 전화로 기사를 송고하면서는 목소리마저 떨렸다. 추기경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시위는 날로 격화됐고, 마침내 넥타이 부대가 가세했다. 정권은 결국 629 항복 선언을 내놨다.

많은 이의 생각과는 달리 추기경 김수환의 명성과 카리스마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1968년 46세의 나이로 대주교 승품과 함께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자 천주교 내부에서부터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구 옹기장수 아들이자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서울대교구장이 되느냐는 얘기들이 오갔다. 일부 주류 원로신부들은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 교구 재정도 부실했다. 당시만 해도 보수 성향이 강하던 한국 가톨릭은 개혁 성향의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 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됐으나 여전히 고통을 겪었다.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서울대교구장 부임 이후 10년을 회고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원로신부님들이 교회 민주화운동을 이해해 주지 않고 다른 목소리를 내신 것이다. 그분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데다 때로는 형님 같은 신부님도 계셨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부와 함께 추기경을 모함하는 탄원서를 만들어 교황청에 보낸 세력도 있었고, 고향인 대구에서는 같은 TK끼리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공격하는 이도 있었다. 24시간 정보형사가 따라붙었고 도청이 지속됐다. 40년 불치병이 된 고질적인 불면증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성모병원에 세무사찰팀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하지만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1974) 31명동사건(1975) 동일방직 노조 탄압사건(1978) 오원춘 사건(1979) 등 굵직굵직한 시국 사건에서 추기경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섰고, 이로 인해 천주교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도 높아졌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그는 장례식장에서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천주교는 보수에서 진보로 방향을 틀었다.

1980년대 들어 추기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와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1984)을 개최했고,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대회(1989)를 성공적으로 치러내 한국 가톨릭의 대내외적 위상을 높였다. 그는 서울대교구장 재임 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역시 광주의 5월이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눈물 많은 로맨티시스트였다. 태조 왕건과 여인천하 같은 사극을 즐겼고, 영화관에서 서편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쉰들러 리스트 포레스트 검프 비욘드 랭군 등을 관람했다. 애창곡은 사랑으로 애모 사랑을 위하여 등대지기였다.

추기경은 또 검소, 소박했다. 1998년 5월 서울대교구장 착좌 30주년 기념인터뷰에서 그는 월급 65만 원에 보너스가 400%인데 이 중 20만30만 원을 매달 헌금하고, 경조사비가 좀 든다고 말했다. 2002년 1월 떼를 쓰다시피 들어가 본 숙소는 기자가 사는 32평 아파트보다도 작고 검소했다. 책상과 소파 서가 외에는 별다른 가구가 없고 평범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신발의 깔창이 오래돼 깊숙이 파여 있어 안쓰러웠던 기억이 난다.

추기경은 또 종교 화합과 대화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강원용 목사, 법정 월주 스님 등과 교분을 나눴고, 한경직 목사의 빈소를 참배했으며,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축사를 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그는 일부 세력에게서 보수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추기경이 서 있는 자리는 한결같았으나 재야()에서 재조()가 된 완장 찬 세력들이 한때 자신들을 가장 옹호, 지지해 준 어른을 몰아세운 것이다. 추기경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추기경 스스로도 내가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해서 슬플 때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화뇌동하며 추기경을 공격하는 언론도 있었다. 2003년 6월에는 동아일보의 대면 인터뷰 제의를 사양하면서 편집국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노무현 대통령이 난국을 타개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6년 2월 22일 정진석 추기경이 후임 추기경으로 서임되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한 추기경의 공헌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크고 위대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링컨 대통령이 있다면 한국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여 년간 추기경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다.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