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성큼 다가오면서 꽃들도 겨우내 움츠렸던 싹을 틔운다. 일본을 상징하는 꽃 사쿠라(벚꽃)가 도쿄()를 향해 북상 중이다. 3월 중순4월 초순이면 일본 전역이 연분홍빛으로 물든다. 꽃 소식이 들려올 쯤 사람들은 자기 동네 벚꽃이 언제 필지 궁금해 한다. 만개하는 시기에 맞춰 야유회 계획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예보를 전할 때 벚꽃의 지역별 개화() 정보를 빼놓지 않는다.
국내 벚꽃축제로는 진해 군항제가 유명하지만 벚꽃 천지인 일본에서 감상하는 재미도 제법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 사람들도 이때만은 예절을 벗어버리고, 꽃구경을 핑계 삼아 공원과 거리에서 음주가무를 즐긴다. 경찰도 꽃구경 한철엔 너그러워진다. 도쿄의 벚꽃 명소인 우에노() 공원에는 하루에 20만명 이상이 몰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다.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신입사원들이 직장의 야간 꽃놀이 장소를 확보하려고 아침 일찍 공원으로 출근하기도 한다.
일본사람들이 벚꽃에 열광하는 것은 활짝 피었다가 며칠도 안돼 덧없이 지고 마는 속성 때문이라고 한다. 봉건시대에는 무사도의 상징으로 여겨져 꽃은 사쿠라요,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순간, 주저 없이 죽음을 택하는 무사의 정신이 화려함을 뽐내다 앗하는 사이에 속절없이 꽃잎을 떨어뜨리는 사쿠라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이다. 일제는 임금의 거처였던 창경궁을 놀이터로 만들면서 토종 꽃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벚꽃을 심었다. 사쿠라에는 식민지시대의 아픈 기억이 배어있다.
광복 후 사쿠라는 한국의 정치무대에서 거듭났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사쿠라는 낮에는 야당, 밤엔 여당으로 장난치는 정치인을 꼬집는 용어로 쓰였다. 이때의 사쿠라는 꽃이 아니라 바람잡이 야바위꾼 박수꾼을 뜻하는 일본어에서 나온 말이다. 민주화와 함께 한국 정치판에서 사쿠라라는 용어는 사라졌다. 하지만 권력과 시류에 따라 정당을 옮겨 다니는 철새 정치인은 아직도 많다. 이들이야말로 21세기판 사쿠라가 아닐까. 총선이 치러질 4월이면 한반도의 벚꽃도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그 흥에 취해 신종 사쿠라에 현혹돼서는 안 될 일이다.
박 원 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