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공론화하고 나섰다. 정당 민주화와 정치자금 투명성 확보 등이 정치 개혁의 소프트웨어라면, 선거구제 변경은 그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구제 변경은 개혁이라는 명분보다는 정파간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현실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더욱 많다.
우리 정치사는 선거구제 논의가 정치 현실에 따라 얼마나 변질되기 쉬운 사안인지를 말해 준다. 유신 시절엔 여당의 안정 의석 확보를 위해 유정회라는 기형적인 교섭단체와 함께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엔 평민당이 지역구도 타파를 명목으로 중선거구제를 들고 나왔고 국민회의와 민주당이 이를 승계했다.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구여권은 정치 상황에 따라 다소 입장이 달랐다.
소선거구제나 중대선거구제나 모두 장단점이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지역구도 완화나 소수정당 및 여성의 원내 진출 확대, 지구당 폐지 등의 정치 풍토 개선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돈이 더 드는 선거가 될 수 있다. 정치 신인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정치의 안정성과 대표성 확보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의원들마다 속내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총선을 1년4개월 앞두고 선거구제 논의가 과연 얼마나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노 당선자 역시 총선을 염두에 두고 중대선거구제를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의 영남 진출과 전국 정당화를 위한 승부수인 셈이다. 일각에선 준()내각제로 이행하기 위한 징검다리가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정치적 함의()가 중대선거구제 논의의 최대 함정인 것이다. 자칫하면 여야가 정치적 득실을 둘러싸고 힘 겨루기만 하다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다.
어느 선거구가 좋으냐에 대한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지금 우리 현실에 맞는 선거구제에 대한 국민적 총의를 모으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개혁만이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