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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왕과 대통령

Posted April. 15, 200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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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나라는 온통 대통령을 뽑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토리 키 재기 식의 경선과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 발언을 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까지 들 정도다. 야당은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여 제왕적 총재의 권한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내부 비판으로 홍역을 앓았고, 여당은 국민참여경선을 한다고 야단법석이더니 음모설까지 나왔다. 정말 대통령이 뭐기에하는 생각이 든다.

야당 총재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제왕적이라는 수식어도 걸린다. 아마도 절대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으로 쓴 말인 듯한데 서양의 절대 군주라면 모를까 우리 전통시대의 왕들은 지금의 대통령보다 훨씬 권한이 약했다. 특히 조선시대의 경우 왕이 밀실에 앉아 육판서() 삼정승()을 마음대로 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삼망()이라 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 명단이 지금의 행정자치부 계장급에서 작성되었는데 그 명단은 당대의 지식인 집단인 사림()의 공론에 입각하였다.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종적으로 그 명단 중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에 낙점하는 것이었다.

세습군주였던 왕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어려서부터 왕이 되기 위한 고된 훈련을 감내하였고, 왕이 되어서도 조강(아침강의) 주강(낮강의) 석강(저녁강의)이라 하여 하루 세 번씩 경연에 참석해 신하들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경연을 하지 않고 무리한 권력을 휘두르거나 파행성을 보일 때 반정()의 대상이 되어 폐위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그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왕을 만들기 위한 학문인 제왕학은 성학()이라 하여 율곡 이이()에 이르러 성학집요()로 완성되었다. 조선적인 지도자학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성학을 꾸준히 장려한 결과 18세기에 이르면 임금이면서 스승이라는 뜻의 군사()를 자부하는 왕들이 나타났으니, 숙종영조정조가 모두 제왕학의 결과로 탄생한 학자군주들이다. 이들은 임금으로서 정계를, 스승으로서 학계를 모두 총괄하였다.

그 제왕들이 주력한 공부는 경학(철학)과 역사였다. 경학을 공부하여 세상의 진리와 이치를 터득해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고 역사를 탐구하여 국가의 흥망성쇠는 물론,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살피고 세상이 변화하는 현상을 파악하였다. 명분과 실리, 의리와 비리, 원칙론과 방법론, 이상론과 현실론을 분별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리기 위함이었다.

한 마디로 사람공부였다. 지도자의 자질 중 사람을 잘 쓰는 것이 최고의 능력임은 동서고금에 변함없는 진리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라고 했다. 지도자는 인재를 알아보고 써서 능력에 따라 배치하고 교통정리하며 일할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왕들이 익힌 것이 균형감각이었다. 탕탕 평평하다는 것이 바로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공평하게 한다는 것으로 사심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고, 왕들의 인격수양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18세기 탕평정책은 모든 이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어 공평하게 정치를 펴 나가겠다는 것이었고, 군사를 표방한 영조 정조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정조대왕은 만년에 왕 노릇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는 말을 여러 번 술회하였다. 왕 노릇 제대로 하려고 세손 시절에는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공부하였다. 왕이 되어서도 신하들을 독려하며 공부하였다. 의식주를 신하들보다 항상 더 검소하게 하였다. 이렇게 자신을 몰아대서인지 아깝게도 49세로 승하하였다.

과연 우리 대통령 중에서 이렇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전력투구한 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 노릇이 즐겁지 않으며 너무 힘들어 못하겠다는 소리 좀 들어 보았으면 싶다.

대통령 후보들은 어려서부터 지도자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수기()에 철저하여 인격완성을 이룬 것도 아니다. 비록 이전투구하듯 하여 되는 대통령이라도 현대적 경연제도를 만들어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어 가면 어떨까 한다. 더도 말고 조선시대 왕들의 반만큼이라도 공부하여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대통령, 적재적소에 인재 쓰기의 용인술과 균형감각을 발휘할 수 있는 대통령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정옥자(서울대 교수, 국사학, 규장각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