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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혹은 시간의 담론-
‘봄날은 간다’
  - 이재현


3.

그러나〈봄날은 간다〉는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들에 사랑이 녹아 있다는 전제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일상적인 순간들이 사랑의 언어로 비등하는 순간들을 잡아낸다. 허진호의 재능이자 영화〈봄날은 간다〉의 특별함은 일상이라는 혼합물 속에서 숨겨져 있는 사랑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내밀한 순간들―사랑의 '에쎈스'를 뽑아내고 정제하는데서 발휘된다. 무성 영화에 가까운, 상우와 은수의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계속되는 소리 녹음 장면들은 일상적인 몸짓이 얼마나 정밀(情密)한 사랑의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며, 상우가 은수와 헤어진 후, 쭈그리고 앉아 흔들리는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정적인 장면은 상실의 슬픔, 두려움이 눈물이나 울음보다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에쎈스'의 추출은 시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롱 테이크로 촬영된 이러한 장면들은 '반 박자'쯤 느리게 연출(주1)되었는데 그로 인해 드러내는 것은 시간이다. '반 박자'의 차이로 발생하는 시간의 느린 흐름은 일상적인 순간이 사랑과 상실의 감정들로 전환되면서 발생하게 되는 시간의 물리적인 변화―사랑의 닮고 달은 상투어, '그때는 시간이 멈춘 듯 했지'라는 사랑에 빠진 이들이 겪게 되는 시간의 '진공'상태―를 성공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영화〈봄날은 간다〉는 주인공들의 감정이 농밀해지는 순간에 시간의 객관적인 흐름을 거부하면서 시간의 비균질적이며 주관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봄날은 간다〉는 지극히 '영화적인' 사랑에 관한 담론―영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쟁은 발레리가 소설을 폄하하면서 예를 든 유명한 어구-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차를 마셨다-를 인용하면서 소설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기록적인 측면이 소설의 창작 가능성을 제한한다면 영화작가는 소설가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위치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화 작가는 후작 부인을 직접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현의 직접성은 결국 영화는 영화의 최소 단위인 하나의 샷에서조차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그렇지만 영화의 본질은 재현의 직접성에 있는 것이 아닌 재현의 연속성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화에 있어 재현의 연속성은 어느 시점에서 소설의 기록성을 넘어서 시의 추상성/상징성에 다가선다. 들뢰즈가 현대 영화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이미지(image-temps)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설명하듯이 영화의 질적 변화는 영화사 초창기 영화의 유기적인 전체(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계량화된 시간이 운동에 종속된 상황, 즉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를 탈피하고 역으로 운동이 시간에 종속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운동이 시간에 종속된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영화가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즉, 운동들을 엮기 위해서 시간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시간의 드러냄을 통해서 운동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드러냄'의 과정에 시간―주관적이며 비균질적이고, 역동적이며 생성 중인 시간이 있다. 결국 현대 영화의 특질은 운동에서 시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 시간 위에서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봄날은 간다〉가 사랑의 담론인 동시에 시간의 담론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실체는 위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시간을 통해서 사유된다. '반 박자'의 차이를 통해서 사랑은 그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들뢰즈의 논리를 따르자면〈봄날은 간다〉와 다른 멜로 영화와의 차이는 현대 영화와 그 이전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차이와 유사하다 (내러티브, 즉 운동을 지향하는 대다수의 멜로 영화에 비해〈봄날은 간다〉는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소를 지향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사랑의 에쎈스가 발휘되는 부분은 영화 전체에 걸쳐 매우 적은 부분이라는 것이다.〈봄날은 간다〉가 단지 영화의 부분적인 순간에만 시간의 논리에 기대 있다면 영화는 잘 만들어진 멜로 영화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봄날은 간다〉는 특정한 순간들만이 시간의 논리에 힘을 빌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전체가 시간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사랑의 담론을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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