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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혹은 시간의 담론-
‘봄날은 간다’
  - 이재현


2.

살갗이 벗겨진 corch: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롤랑 바르뜨,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 여자 주인공 은수가 읇조리는 노래 가사가 대변하듯이 영화〈봄날은 간다〉는 내러티브면에서 젊은 연인의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그러나〈봄날은 간다〉에는 관객들이 일반적으로 멜로 영화에서 기대하는 '영화적인 재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랑의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엮는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극적인 만남도, 자극적인 사랑의 순간도 없다. 게다가 이별의 과정에서는 '친절한 설명'도 빠져 있다. 이처럼 영화는 관객의 기대지평에서 한 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리고 너스레를 떨 듯이 사랑의 순간에 라면을 끓여 주고, 연인의 등을 긁어주고, 운전을 가르쳐 주고, 이별의 순간에 창가에 앉아 트로트를 부르고, 연인의 차를 긁는다. 사랑의 의미들이 실려있지 않을 것 같은 소소(小小)한 순간들의 연속.



〈봄날은 간다〉는 이처럼 일상에 던져진 사랑의 모습을 관찰한다. 영화는 사랑의 기념비적인 사건들 보다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에 충실하며 사랑이란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들 사이의 순간들 ― 과정이며 지속이라고 말한다.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대다수의 사랑에 관한 담론이 사랑에서 시작(만남)과 끝(헤어짐)의 우연성과 비극성만을 부각시키면서 사랑에 대한 허위 의식(?)을 독자 혹은 관객에서 심어준다면〈봄날은 간다〉는 사랑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것은 수많은 순간들 중의 하나 ― 그것도 매우 예외적인 순간인 것임을, 사랑의 본질이란 시작과 끝 사이의 무수히 작은 순간들의 지속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영화〈봄날은 간다〉는 이러한 일상적인 순간들의 지속에서 사랑의 언어, 혹은 상실의 언어를 읽어 낸다.



그런데〈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상실의 언어는 음성으로 실현되기 이전의 언어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그 안에 사랑이 존재하듯이, 사랑은 명명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복잡한 감정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영화〈봄날은 간다〉는 일상의 힘을 빌어 이러한 감정들 전체를 담아내려고 한다. 무수한 사랑의 담론을 통해서 형식화되고 각질화된 사랑에서 껍데기를 제거한 후의 무정형의, '날 것'으로서의 사랑, 일상이라는 혼합물 속에 섞여 있는 사랑이라는 그 '모호한 욕망'의 덩어리를 통째로 관객에게 선사한다. 영화 속에서 은수와 상우의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닌, 상우가 은수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강릉까지 달려가고, 늦은 밤 누워서 히죽히죽 웃는 곳에 있다. 그리고 이별은 은수가 짐을 싸놓고 홀로 웅크리고 있고, 창가에 앉아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그 곳에 있다. 영화는 거기 그렇게 오래 전부터 사랑이 끓고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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