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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 인물의 탄생과 진화 -
백민석론
        - 안미영


1. 엽기적 인물의 탄생

'엽기(獵奇)'는 '괴이한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을 의미한다. '괴이한 것'이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소설의 허구성(fiction)은 이 시대 엽기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소설에서 작중 인물의 엽기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작가로 백민석을 들 수 있다. 백민석 소설에 나타난 엽기적 인물의 특성을 살펴보기 앞서, 우선 소설의 인물 유형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E.M. 포스터는 인물을 성격 표출양상에 따라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과 '입체적 인물(round character)'로 구분한다. 고전 소설의 인물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이분법적 도식에 따라 시종일관 선(善)과 악(惡)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평면적 인물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 현대 소설에서 다수의 주인공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다양한 성격변모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입체적 인물에 근접해 있다. 입체적 인물은 개별적 능력에 따라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범 이상의 비범한 능력을 소지한 '영웅'과 평범 이하의 비천하고 비루한 모습을 보여주는 '악당' 및 '바보'를 들 수 있다. 전래적으로 소설에서 '영웅'은 '실현되어야 할 현실'을 장엄하게 보여주고 있는 반면, '악당'과 '바보'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현실'을 냉소적이고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 유형구분에 의하면, '엽기적 인물'은 '악당'과 '바보'를 동시에 구현하는 입체적 인물이며, 그들의 문학적 의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데 있다.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은 입체적 인물로서 '악당' 및 '바보'의 극단적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 남녀는 대학 강사와 수학 과외교사로서의 사회적 존재 의의를 띠지 않으며, 단지 '수컷'과 '암컷'으로 구분된다. 그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광포한 동물성만 남아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악당'이다. 미소년을 추행하고 죽이는 범행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반인륜적인 범죄자라 추궁할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적잖은 비감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이 '악당'이 행사하는 폭력은 종국에는 그들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들이 '악당'인 동시에 '바보'이며, 범죄자(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피해자)라는 점에서 독자는 경악과 조소에 앞서 좌절과 비애를 절감한다. 그들의 악행이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채 자기 파괴에 그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이 현실에서 '받아야 할 그 무엇', '누려야 할 그 어떤 것'을 상실한 원초적인 결손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의 의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의 비극적 삶을 통해, 현실에 부재한 제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데 있다(주1). 그런 의미에서 백민석 소설에 나타난 '엽기적 인물'의 추적은 현실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규명해 나가는 의미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의 성년과 유년 소급을 통해, '엽기적 인물'의 탄생과 진화과정을 추적해 보고, 그들이 원초적으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반(反)현실에서 탈(脫)현실로 질주

『목화밭 엽기전』의 '한창림'과 '박태자'가 '엽기적 인물'로 진화하기 이전, 그들 역시 평범한 일상의 소년과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대학 강사가 되고, 수학 과외교사가 되기까지 그들의 성장과정을 백민석의 이전 작품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할리퀸 러브 로망 문고에서 종종 읽을 수 있는, 그리고 비디오 숖에서 구해 오는 110분짜리 로맨스물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그런 서스펜스와 대모험으로 가득 찬 사랑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을까 --(중략)-- 할리퀸 문고는 대개 반나절이면 읽을 수 있었고, 사랑의 향기로 가득한 비디오 테이프 역시 길어 봤자 두어 시간 내외였다. 그 정도 시간에 실제의 내가 실제의 사랑의 추억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내가 소유한 시간이란 그에 비하면 턱없이 길고 지루하며 필름과 인쇄물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어째서 무엇에든 쉽게 지치고 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시 두 종류의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와 할리퀸 문고, 그리고 지긋지긋하고 별 의미없던 재수 시절 (58-59면, 『캔디), 밑줄:인용자)
내가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시간('비디오 테이프와 할리퀸 문고', '재수 시절') 어디에도 실제 '현실'은 없다. 성년기의 '나'는 '현실에 대한 탈주'와 '현실에 대한 반항' 양자 사이를 부유하면서 세계에 대한 사유방식을 터득한다. 『캔디』는 성년기에 접어든 내가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반현실주의자인 '반장(反長)'과 탈현실주의자인 '캔디(candy)'로 양분하여 보여준다. '나'는 무조건 현실에 배타적인 '反長'과 아예 현실에서 일탈한 동성애자 '캔디'를 통해, 현실에 반항(反현실)하던지 현실을 간과(脫현실)해 버리는 인물로 성장한다. 대학 시절, '나'는 시위현장에서 반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현실 문제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시대감각으로 이 시대에 습관적으로 반항한다. 뚜렷하지 않은 현실의 저항 심리에 비해, 내가 캔디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체의 의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캔디' 부류의 인물을 설명하자면, "실제로 뭔가를 때려 치우기보다는 살짝 비켜가는, 그저 때려 치우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아이들"(31면, 『캔디』)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무수한 캔디들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외부 세계와 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내면 세계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 세대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현실의 제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내고 불러낼 수 있는 환영(幻影·이미지)이라는 점에서, 캔디 세대는 탈현실주의자들이다. '반항'이 반항하고자 하는 그 대상(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전제해 있다고 볼 때, '일탈'은 그 대상(현실)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다. 탈현실주의자로서 '나'는 만화(漫畵)적 인물을 통해 점차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 경도된다.

백민석 소설에서 '캔디'와 같은 만화영화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의는 크다. '엽기적 인물'은 유년시절부터 탈현실주의 세계로 질주해 나갔으며, 이들을 탈현실의 세계로 이끌었던 존재가 바로 컬러 텔레비전의 만화영화 주인공들(딱따구리, 오로라공주와손오공, 마이티마우스, 집없는소년, 달려라뽀빠이, 요술공주새리, 박스바니와 그의 친구들)이다. '애니메이션'이 "원래, 실제 동화(動畵)와 우리 눈 사이에 생기는 균열을 이용한 속임수"(234면, 『헤이). 밑줄:인용자)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이들은 유년 시절부터 '허상(動畵)'을 통해 '현실(눈)'을 간과할 수 있는 속임수에 감쪽같이 길들여져 왔던 것이다. 현실보다는 허상(動畵·이미지)에 정신을 집중했던 그들은 현실에 반항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일탈하는 일이 더 쉬웠던 것이다.

왜 이들은 집 밖의 실제 세계(현실)로 나아가지 않고, 텔레비전 키드가 되어 허상의 세계로 질주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나'와 '세계'를 연결해 주는 '매개'가 부재해 있기 때문이다. 『헤이』에서 '딱따구리들'이 즐겨 부르는 고아들의 노래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어른들은 물으시죠, 너희 아버지는 어딨니 얘야, 너희 어머니는 어딨니 --(중략)-- 저희가 뭘 알겠어요, 아빠는 출근한다고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오질 않고/저희가 어떻게 알겠어요, 엄마는 설거지하다 말고 끌려나가 고추밭이 다 죽도록 돌아오질 않는데"(『헤이』, 112면) - '가정'과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없는 '나'에게 "그것(가족:인용자)은 내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조차 설명해줄 수 없"(「요람속의 고양이 둘」, 『16』, 111면)는 "신비", 또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



'엽기적 인물'의 유년기에는 세계라고 하는 '밖'과 나(我)라고 하는 '안'을 매개하는 '가정'과 '가족'이 부재해 있다. 그들은 오후 5-6시 가족들과 더불어 '생선가시'를 발라먹어야 할 저녁 식사시간에 홀로 앉아 '캔디'와 '뽀빠이' 등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부재한 그들의 '가정'에 대해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법을 배우는가 하면, 파이프를 물고 근육질의 팔뚝을 자랑하는 뽀빠이를 통해 외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의 비결을 터득한다. 그들은 온전히 돌아갈 가정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편입되지도 못한 채,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 주인공의 삶과 자신의 일상을 동일시한다. 그들은 유년기와 소년기, 가족과 가정 그리고 학교로부터 배워야 할 성장(성숙)과 관련된 모든 것을 텔레비전과 밀폐된 도서관, 진창 늪의 극장에서 배우고, 무허가촌의 뒷골목과 야산에서 실습한다.

현실의 체계 속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은 항시 자신과 세계를 매개해 줄 수 있는 가정과 가족이라고 하는 안전지대를 동경한다. 작중 '생선가시'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개인에게 부재한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여기에는 결손과 결핍을 채우려는 인물의 무의식적 욕망이 내재해 있다. 로즈메리 잭슨의 지적처럼 환상은 불연속적이지만 연결된 단위들로 구성된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정상적인 혹은 '상식적인' 관점을 위반하면서 각각의 것들을 분리시키는 구별이 부재한 상황을 설정하거나 그 부재를 폭로한다.(『환상성』, 69면) 작중 주인공들의 현실에 대한 일탈은 환상(幻想)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부재한 제요소들을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가령, 『한스』에서 '나'는 '생선가시'의 환영을 보는가 하면, 「Green Green Grass of Home」(『16』)에서 '나'는 '그린맨(green man)'을 만난다. 그러나, 현실에서 환영이 극히 일시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삶의 여유가 될 수 있지만, 현실보다 환영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진다면 그것은 일종의 정신질환이 된다. '엽기적 인물'의 탄생을 둘러싼 기저에는 탈현실주의자의 환상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의 환상이 점차 현실을 압도해 나가면서 독특한 성격의 인물을 창출하기에 이른다.

3. 정신질환자에서 괴물로 진화

백민석 소설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은 유년기부터 정신질환을 앓는다. 『한스』에서 초등학생인 '나'는 부족한 영향과 정서 불안으로 환영을 보며 병원에 출입한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소년 시절이래, 쭉 보아왔던 '생선가시'와 전이감 때문에 종합병원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헤이』에서 'K'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특정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다. '憙'의 종잡을 수 없는 독백과 환영, '아파트 수위'의 정신질환은 저 자신도 수위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일면을 반영한다. '새리'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신체(안구)의 정상적인 기능(시력)을 잃는다. 해부학적 손상이 아닌 정신적 외상(성폭행의 충격)으로 인해, 개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체 일부인 시신경을 스스로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은 유년기이래 타자를 비롯한 사회로부터 받은 상흔 때문에 제대로 현실의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스스로 가상의 이미지를 환영의 형태로 간직하며 살아간다. 유년기의 정신질환자들은 사회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현실에 반항하거나 탈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치지만, 성인이 된 이후 그들은 난폭한 괴물이 되어 현실을 파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된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던 유년기의 정신질환자들이 이제 인간성이 부재한 괴물이 되어 현실을 파괴하려 한다. 정신질환자가 현실로부터 소외된 수동적 인물인 반면, 괴물은 현실을 전복하려는 적극적 인물이다. 심각한 정신질환이 급기야 납치, 폭행, 고문, 살인, 강간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폭력을 자행하는 엽기적 인물의 탄생을 초래한 것이다.

『목화밭 엽기전』에서 '박태자'는 울증과 조증 사이를 저속으로 왕복하며 생활한다. 처음에는 병원 정신과에서 처방을 받아왔지만, 이제 각성제 겸 진정제로 복용하는 암페타민을 직접 암거래한다. 그녀는 '박태자'라는 인간성보다는 '암컷'의 동물성을 실현한다. 이러한 사정은 '박태자'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창림'을 포함하여 '뷰티풀피풀'을 경영하는 언니와 그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정상적인 인간성이 거세되어 있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광포한 동물성이다. 이러한 괴물들에게 불편한 것은 '사색'이고, 필수적인 것은 '안전거리'이다.

사색은 수상기 속뿐 아니라, 그녀의 집에도 없다. 그녀의 집 구석구석에서 진행되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일상 어디에도, 사색이란 물건은 없다. 남편은 사색보다는 하, 소리를 지르며 만드릴 원숭이처럼 날뛰기를 더 좋아하고, 그녀 역시 사색보다는 발작하길 더 즐겼다. 그녀가 무엇이라도 좀 사색하기 위해선, 암페타민 몇 알을 삼켜야 한다.(196면)

암컷과 수컷 사이에 무슨, 안전거리 규정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안전거리는, 육체를 가진 생물이면 어느 것에나 있는 것이었다. 육체란, 공간이라서 그렇다. 해수 속의 박테리아부터, 사우나탕 휴면실에서 잠잘 자리를 찾는 발가벗은 사내들까지, 그 살아 있는 공간인 육체는 항상, 타생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불안해지지 않으려면, 불안해지지 않고 최소한의 안정이라도 누리고 싶다면, 그리고 불안해진 나머지 이웃의 목을 물어뜯어 정맥을 끊어놓고 싶지 않다면, 안전거리를 무시하고 너무 가까이 서 있으면 다친다.(171면)
인간이 '암컷'과 '수컷'으로 정의되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은 '사색'이 아니라 '안전거리'의 조절이다. 시인 최승호가 형상화한 '고슴도치' 인간들처럼(『고슴도치의 마을』), 그들은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공격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고슴도치 인간들 사이에 형성된 '방어'와 '공격'의 '거리'를 시인 정현종은 '섬'으로 형상화한 바 있는데(『나는 별아저씨』), 이때 '섬'은 도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독과 단절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거리'의 목적성을 의미하는 '안전'이라는 표식어는 역설적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원화 및 비인간화의 극한에 광포한 동물의 감각성이 꿈틀거린다. 그들에게는 이지적 요소보다 독취(촉각)와 같은 감각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광포한 '수컷'인 남편의 독취는 '박태자'가 남편을 인식하는 표식이다. "남편의 냄새와 비교할 만한 냄새를 굳이 찾자면" "대기가 무거운 날, 동물원 실내 관람장에 터질 듯 포화돼 있는 독취를 들 수 있다. 시멘트와 플렉시 유리의 사육장에 갇혀, 몇 년씩이나 인스턴트의 삶을 산 동물들의 독취를 들 수 있다."(195-196면) '인간의 이성'을 대변하는 '사색'에 대해 '동물의 감각성'을 대변하는 '독취', 이때 인간의 표식이 사색(이성)이라면, 괴물의 표식은 후각(감각)이다.

괴물들의 '사색 부재'가 감각성의 '독취'로 드러나고 있다면, '감정 부재'는 '인형(人形)'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무감정·무의지의 가공적 인간, 인형은 '웃는 플라스틱'으로서 "인간의 형상을 흉내낸 솜씨는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그 근원의 성질은 도무지 인간과 다른 점이 없"다. "휘면 휘어지고 자르면 잘라지고 뽑으면 뽑혀지고, 눈엔 초점이 없으며, 속은 텅 비어 가볍기 한이 없고, 아무리 사랑해줘도 반응이 없다."(72면) 『목화밭 엽기전』의 괴물들이 사색없이 감각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감동과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인형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무감정·무의지의 인조 인간, 괴물은 결국 현실의 체계가 조작해 놓은 또 하나의 인공물이자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조작된 존재, 만들어진 존재, 유희의 존재라는 점에서 그들은 현실의 체계가 만들어 놓은 부속물에 불과하며 그런 까닭에 그들을 창조해 놓은 조물주(체계)에 대한 그들의 저항은 실상 조물주(체계)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수컷'과 '암컷'들은 "아무리 지랄을 쳐도 자기가 태어난 이 사회에 한뼘 손톱 자국조차, 한 뼘 이빨 자국조차 낼 수 없는 무력한, 비극적인 존재였다. 둔덕에 수백 구의 시체를 파내어도 비극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었다. 영원히 바깥의 존재로 운명지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게 뻔했던 운명들이었다."(261-262면) 그들의 폭력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귀결된다. '수컷'으로서 '한창림'의 동물적 공격성은 경찰에게 자신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 수감되고, '암컷'으로서 '박태자'의 모성행위(유괴아에게 젖물리기)는 범행을 실패로 몰고 가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작중 괴물은 일세를 풍미할 악당으로서 그 위세를 떨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실의 체계에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못한 채, 고작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왜냐하면 백민석 소설에서 '엽기적 인물'은 생래적으로 타고난 괴물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의해 스스로 정신질환자에서 괴물로 진화해 버렸다는 점에서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실의 체계가 괴물과 같은 인형, 혹은 인형과 같은 괴물을 양산하여 체계에 대한 공포와 위협을 다시금 과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마치 '원형감옥'이 수형자들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외부 사람들에게 범법 행위에 대한 응징과 체계의 권력을 강조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푸꼬의 지적처럼, 백민석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의 출현과 비극적 종말은 현실에 건재하는 체계의 보다 원활한 기능과 위엄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그 소임을 잘 완수해 내고 있다.

작중에서 체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도시(과천)'와 '동물원'의 결합이 이를 반증한다. 동물들이 제아무리 포악스럽더라도 체계는 이러한 동물을 울타리 내에서 인위적으로 잘 규율하고 관리하여 광포한 동물을 인형('웃는 플라스틱')과 같은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체계의 권력을 과시한다. 『목화밭 엽기전』에서 현실의 체계는 "잠들어 있던 괴물을 억지로 깨워 불러들여 놓곤, 재미로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종국엔 괴물이 왔던 곳, 사회 체계 바깥으로 다시 쫓아보"(261면)낸다. 괴물의 악덕이 체계의 질서를 위협한다는 명목하에 처벌받는 것으로 종결되는 『목화밭 엽기전』은 에르네스트 만넬의 지적처럼 정의와 범죄라는 이분화된 도식에 의해 부르조아 이데올로기(국가, 사유재산, 법, 정의)의 본성을 은폐한다.(『즐거운 살인), 91-92면) 이러한 체계의 보이지 않는 거대 폭력에 비해, '엽기적 인물'이 창출해 낸 괴물은 그다지 난폭하지 않으며 교활하지도 않다. '한창림'과 '박태자'가 제아무리 극악한 괴물의 행적을 일삼더라도 "사회 체계 안의 내용물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괴물스런 위력이 얼마나 막강하든, 바깥에 존재하는 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260면)다. 괴물은 그저 "사회 체계 바깥의 존재"(260면)로서 이 땅의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체계에 편입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체계가 요구하는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캔디』에서 '한선생'은 교장을 향해 말한다. "도대체 그 뿌리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요. 증명해 봐요. 그게 학벌을 말하는 거요. 당신 고향집을 말하는 거요. 당신의 그 대단찮은 패밀리를 말하는 거요? 혹시 정권의 주구 노릇은 아니요?"(『캔디), 71-72면, 밑줄:인용자) '학벌', '고향집', '패밀리', '정권의 주구' 등 뿌리를 구성하는 제요소가 결국 체계로 편입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할 때, '박태자'와 '한창림'은 이러한 뿌리를 타고나지 않았다. 『헤이』에서 무허가촌(無許可村)의 아이들은 '집'이 체계로부터 허가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태생(삶)' 역시 체계로부터 허락되지 않았다. 허가되지 않은 마을과 허가되지 않은 집, 그리고 허가되지 않은 삶(태생)은 그들을 체계 밖의 존재로 몰고 간다. 이 때 체계에 의해 헐려 없어지는 것은 고향, 집과 같은 가시적인 공간만이 아니라, 유년시절의 기억 및 꿈과 같은 긍정적 세계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체계로 편입될 수 있는 발판이 없기 때문에 반항아이거나, 미성숙아이거나, 정신질환자, 기껏해야 '수컷'의 기질만을 보여주는 괴물, 아웃사이더로 진화한다.

이 땅의 아웃사이더들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이러한 괴물 한 마리를 키우고 있거나 괴물이 되고 싶은 잠재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웃사이더들은 설령 그들이 내면에 잠재해 있는 괴물을 현실의 체계에 불러들이더라도 자신이 인사이더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내면의 괴물을 현실에 소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림'은 '수컷'이 되고, '박태자'가 '암컷'이 되어 내면의 괴물을 불러낸 사실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미련스러울 만치 바보같은 짓이다. 체계의 아웃사이더에 불과한 그들이 체계의 내부를 변화시킨다는 일 자체가 무모하고 무용한 '엽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목화밭 엽기전』에 출현한 '엽기적 인물'은 우리들 내면의 슬픈 자화상을 대변한다. 종국에 괴물의 죽음은 이 사회에 일정한 '기의'를 형성하지 못한 채, 기표로서 상징적인 비극성만을 내포한다. '목화밭'에 출현한 '엽기적 인물'은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제 말이 되지 못한 그들 내면의 언어를 읽어내고 그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할 것이다.

4. 폭력과 환상을 통한 환멸 세계의 극복:'권장할 만한' 진화를 꿈꾸며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 출현한 '엽기적 인물'은 이전 소설에 나타난 유년기와 성년기의 작중 주인공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진화한 인물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정신질환자에서 괴물로 진화한 기표상의 변화가 소설내에서 일정한 기의를 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곧 작가로서 백민석의 소설 쓰기의 진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

엽기적 인물의 진화여부를 묻기 앞서 진화의 개념을 되짚어 보면, 진화는 단순히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혹은 하등에서 고등으로 생물 자체의 생물학적 진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의 가장 큰 의의는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는 데 있다. 진화가 개체와 환경 양자간의 조화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주체의 의지가 드러나 있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나'라고 하는 주체가 어떻게 세계라고 하는 거대한 환경에 적응해 나가려고 노력하는가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백민석이 창조한 '엽기적 인물'의 특징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진한 인물군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비감과 아울러 호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독특한 양가성('악당'인 동시에 '바보')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초적인 결손 인물로서, 그들은 자신에게 부재한 것에 대한 욕망을 각각 '폭력'과 '환영'의 형태로 표출한다. 체계에 대한 반항아들의 권력 욕망이 구체화된 것이 '폭력'이라면, 부재한 정서적 요소들에 대한 현실적 욕망은 '환상'으로 나타난다. 현실에 건재하기 위해 괴물은 폭력을 휘두르고, 정신질환자들은 결핍한 내면의 일부를 환상으로 대체한다. '폭력'과 '환상'은 언어가 되지 못한 엽기적 인물의 의사소통 행위이다. 제대로 자신의 말과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세계로 나와 버린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들에게 준비된 것은 행동할 수 있는 몸과 상상단계의 의식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엽기적 인물'의 '폭력'과 '환상'은 이 세계에 대한 미성숙한 언어로서 눈여겨 보아주고 읽어 들여야하며, 이 사회에 대한 간절한 소통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폭력'과 '환상'이 '언어'가 아니라는 차별성에 주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의사 표현방식이라는 점에 착안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언어를 체득하지 못한 채 괴물로 진화한 '목화밭'의 '엽기적 인물'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부정적 세계인식과 조우할 수 있다. 백민석에 의하면, 한 인간을 괴물로 진화시키는 이 사회야 말로 환멸의 세계이다. 이 즈음에서 이제 '신세대작가'의 직함을 뛰어넘은 백민석에게 '환멸의 상상력'이라는 또 하나의 비전을 제시하고 싶다. 이 세계가 환멸로 가득 차 있을수록 이 땅의 작가는 사제(司祭)의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고통을 뛰어넘는 자만이 성자(聖者)라고 할 때, 환멸의 세계에서 문학(작가)은 고통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 그 고통이 발효된 인고(忍苦)의 흔적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환멸의 세계에서 희망의 씨앗, 즉 다시 꿈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민석이 제시하는 '구멍'의 상상력은 일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엽기적 인물'은 그로테스크한 환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부재의 공간이 아니라 생성과 창조의 공간으로 다시금 정의하고 있다. 『헤이』에서 딱따구리들이 '동굴'을 찾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근작 『장원』에서 도시인들은 이제 자신의 내면에 '구멍'을 발견한다. 그 구멍은 '식물성 애완공간'(「검은 초원의 한켠」)이 되기도 하고, 내가 너에게 다가설 수 있는 '틈'(「아주 작은 한 구멍」)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 구멍은 일찍이 『목화밭 엽기전』에서 괴물이 꿈꾸던 '목화밭'이기도 하다. 이제 그 구멍이 자신의 내면에서 벗어나 이 땅에 버젖이 한 켠의 식물성 풍만한 목화밭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바란다.

(주)
1.백민석 소설의 인물들은 현실의 문법에 비추어 볼 때, 다분히 가상적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 작중 인물의 언동이 현실의 문법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독자들은 가독이 어렵다. 지금까지 발표한 6편의 작품집(『내가 사랑한 캔디)『헤이, 우리 소풍간다)『불쌍한 꼬마 한스)『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목화밭 엽기전)『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중에서 특히,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는 소설의 인물뿐 아니라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상황설정마저도 현실과 낙차가 큰 가상의 세계라는 점에서 쉽게 읽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적다.



[단 평]

남해 금산의 '돌' 이야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남해 금산」(『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1986, 90면)



이 시는 '나와 한 여자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가 문제적인 것은 그 여자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돌 속에 묻혀 있"던 여자라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여 그 여자의 고통마저 사랑하고, 한 걸음 나아가 고통에서 벗어난 그 여자가 떠나가는 것 마저 담담히 관조할 수 있는 작중 화자의 성숙한 내면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돌 속에 묻혀 있던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해서 돌 속에 들어갔으나, 여자는 떠나고 돌 속에 혼자 남아 있는 나'라고 하는 두 가지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

'돌 속에 묻혀 있던 여자'의 입장이 어떠한 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돌'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이상(李箱)의 '이런 詩'에는 나를 주체로 내가 사랑한 "커다란 돌"과 "그 돌을 업어간 어떤 돌"이 등장한다. 이 때 '돌'은 특정 여인과 그 여인을 채 간 다른 남성, 즉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성복의 시에서 '돌'은 여자와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가 '돌' 속에 묻혀 있었으나, 이후에는 여자가 '돌' 속에서 자발적으로 떠나간다. 돌로부터 여자의 이탈 과정을 "해와 달이 끌어"준다고 하는 걸로 보아, 돌은 그 여자에게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써, 상처와 고통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돌이 물렁물렁하지 않고, 굳고 단단하며, 그것을 깨뜨리지 않는 한 외부에서의 틈입이 불가하다는 광물의 속성으로 볼 때, 돌은 그 여자의 상처와 고통의 밀도를 적절히 형상화 해 내고 있다.

흔히 우리는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내면의 소유자를 돌덩이(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사물의 속성을 빌어 표현한다. 결국 여자는 자신이 받은 고통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면을 꼭 닫고 있으며, 이때 '돌'은 고통의 밀도(과거성)와 외부와의 단절(현재성)이라는 다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돌 속에 들어앉은 이런 여자가 내 사랑에 쉬이 동요될 리 없다.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나는 돌처럼 굳어 버린 그녀의 내면으로 직접 들어간다.

이제, '그 여자를 사랑해서 돌 속에 들어갔으나, 여자는 떠나고 돌 속에 혼자 남아 있는 나'의 내면을 쫓아가 보자. 한 여자를 사랑한 나는 그 여자의 보이는 부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고통과 상처까지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그 여자는 "어느 여름 비 많이 오"는 날 돌 속에서 떠난다. 이 때, '많이 내리는 여름 비'는 그 여자의 응어리진 상처를 씻어 내는 치유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다. 아마도 여름 한철 내내 내린 그 비는 시속의 화자인 내가 여자에게 베푼 헌신적인 사랑의 환유일 것이다. 떠나가는 여자를 지켜보며,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라고 자조하며 인고할 수 있을 정도의 내면이라면, 소나기 같은 사랑이 아니라 여름 한철 내내 내리는 비와 같은 지극한 사랑이 선행해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떠나가고 나는 혼자 남는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나 혼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애잔하지만, '나 혼자 잠기'는 모습을 통해 그 여자가 지닌 돌덩이를 사랑하고 이제 자신이 또 하나의 돌 속에 무겁게 짓눌려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읽어 내려가면서 우리도 애감에 잠긴다.

그러나, 내가 처해 있는 곳이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이며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하늘과 바다의 푸름' 그리고 '남해에 있는 금산(金山)'이라는 밝은 이미지를 통해 청명하고 고귀한 사랑을 엿보며 이별의 비감보다는 미적 감수성과 조우한다.

우리는 내면에 돌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이 시의 여자는 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돌 속에서 빠져 나온 운 좋은 경우이다. 허나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슴의 돌덩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무거우면 무거운 채로,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먼길을 멍에처럼 들고 가야 하는 것일까. 이 시가 수록된 시집(『남해 금산』)의 다른 작품에서 이성복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위의 책, 16면).

이 말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전언이다. 그렇다면, 맹자의 이런 어구를 이 자리에서 떠올려 보면 어떨까. 생어우환이사어안락(生於憂患而死於安樂),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다. '우환'에 대해서 좀더 부연하자면, 사람은 항상 과실이 있은 뒤, 그리고 생각이 걸린 후에야 깨달을 수 있다.

다시 이성복의 전언으로 돌아와 그 의미를 되새겨 보자면, "삶"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많은 아픔을 주는 것이며, 이를 계기로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한층 개선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슴의 돌을 던져 버리기 위해, 굳이 먼길을 돌아갈 필요 없이 맹자의 '반구제신(反求諸身)'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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