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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세계,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 심은진


2.

영화는 빛의 움직임으로 현실의 시뮬라크르를 만든다. 우리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것은 스크린이라고 부르는 하얀 막 위에 펼쳐지는 빛의 파장들이다. 그러나 이 파장들은 그 움직임만큼 자유로운 공간을 갖고 있지는 않다. 빛의 움직임은 네모난 틀 속에 갇혀있다. 우리는 이 틀을 흔히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프레임은 영화의 이미지를 경계짓는 틀이다. 그림과 사진, 영화를 보는 우리의 지각은 프레임이라는 이러한 사각의 틀에 길들여져 있다. 춘희의 방은 이러한 사각의 틀들의 전시장이다. 방의 곳곳에 걸린 네모난 액자, 부엌과 방 사이의 벽에 뚫려있는 네모난 틀, 침대 옆벽에 붙은 네모난 세계지도, 책장 위의 네모난 그림엽서, 그리고, 심지어 이불의 무수하게 많은 사각형의 무늬들. 이 영화는 이러한 사각의 틀들을 고의로, 끊임없이 노출시키며 우리들에게 그 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틀은 왜 사각인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눈은 둥근데 왜 그림들은 사각의 틀 속에 담겨있을까? 카메라는 둥근 렌즈로 세상을 포착하고, 영사기는 둥근 입으로 빛들을 뿜어내는데 왜 사진이나 영화는 네모 칸 안에서 이미지들을 전달하는가? 사각의 틀은 가시적인 공간,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공간을 기하학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리오타르는, 글을 쓰는 것이 그러하듯, 이미지를 사각의 틀 속에 담는 것은 세계를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 세계를 추상화시키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춘희는 철수에게 손가락으로 네모난 틀을 만들어 보이며, 이렇게 보면 세상이 다 의미 있어 보여 라고 말한다. 틀은 눈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한한다. 그러나 틀은 틀 안의 세계를 재배치하고 구성하면서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영화는 틀이 갖는 이러한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다. 다혜와 철수 춘희가 만나는 장면에서 다혜는 철수, 춘희와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춘희와 철수는 한 화면 속에 잡히지만, 다혜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혜는 변심했고 철수는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실은, 더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다혜는 다른 세계, 철수와 춘희가 만드는 시나리오의 세계, 허구의 세계에 속하게 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인공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춘희와 인공은 한 화면 안에 잡히지 않는다. 인공에 대한 춘희의 사랑이 일방적인 짝사랑이듯, 인공은 춘희의 카메라 속에 담길 뿐이지 춘희와 인공, 두 사람이 나란히 한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 영화의 제목 또한 틀 속의 공간을 상징한다. 미술관과 동물원은 모두 가두어 두는 공간이다. 미술관은 틀 속에 담긴 그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동물원은 날 것의 짐승들, 길들여지지 않은 것들을 가두는 공간이다. 자유로운 들판을 질주하던 야생의 동물들은 철창 속에 갇혀, 인간이 강요하는 규칙에 따라, 길들여 져야한다. 마치,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한 순간 화가의 눈이나 카메라에 포착되어 -포착과 포획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틀 속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길들여진다는 것은 인간의 코드에 맞게 재배치되는 것이다. 틀 안에서 길들여진 동물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아니, 보여지기 위해 틀 속에 담긴다. 틀은 이처럼 날 것들을 가두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의 이미지에는 회화의 틀처럼 금속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가시적인 분명한 틀은 없다. 그러면 영화와 현실을 가르는 틀은 무엇일까? 그것은 컴컴한 동굴 속 같은 극장 안의 어두움, '익명의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수많은 어두움', 확산된 에로티시즘의 색채라고 바르트가 말하는 그 어두움이다. 어두움은 영화의 매혹 그 자체이다. 시나리오 속의 인공이 밤마다 관찰하는 어두운 우주의 빛나는 별처럼, 혹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동일시하는 다혜의 달처럼, 영화의 이미지들은 검은 공간을 가로지르며 하얀 영사막 위로 쏟아지는 빛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영화의 아우라는 밤이다. 밤 동안 춘희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인공과 다혜는 밤에 자전거를 타고, 사랑의 이야기를 나눈다. 밤에 산책 나간 춘희는 고장난 철수의 차에 갇혀 보름달을 보며, 인공과 다혜의 사랑 이야기를 상상한다. 달은 스크린에 대한 훌륭한 비유이다. 달이 항상 한 면만 보여주듯 우리는 스크린 뒤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달, 태양 빛을 받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달처럼, 스크린 위의 이미지들은 밝은 빛 속에서는 창백해지고, 변질되고, 지워진다. 어두움은 영화의 이미지를 붙잡고, 이미지를 현존케 하고, 틀을 만들어주며 형상을 제공한다. 그 어두움이 만든 사각의 입방체 안에서 영사기의 빛들은 춤을 춘다.

틀은 작품을 열고 닫는 것이다. 틀은 선택이고 의미의 부여이다. 그러나 틀은 질주하는 우리의 시선을 구속하고 우리의 사유를 추상화시킨다. 철수는 춘희의 사랑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갇힌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가두는 것으로서의 틀의 개념에서 더 나간다. 영화와 그림의 틀은 같지만 다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틀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춘희의 방에 있는 액자나 사진, 다혜가 있는 미술관의 그림들이 갖고 있는 틀이다. 그림의 틀은 날 것의 세계, 구체적인 세계를 그림의 세계와 구분 지어 준다. 다른 하나는 춘희 방의 창문이나 자동차의 유리의 틀이다. 창문의 틀은 사각의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라는 점에서는 그림의 틀과 동일하지만 창문 밖의 세계, 그 틀을 둘러싼, 창문 너머의 더 넓은 세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창문은 그 뒤에 우리의 시야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의 부분만이 우리에게 보여질 뿐인, 그 무엇인가가 있다. 숨겨져 있는 것, 보여지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영화의 프레임에는 창문의 개념이 들어있다. 영화의 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창문으로 보여지는 풍경이 보여지지 않는 풍경의 일부뿐인 것처럼,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만들어 내는 허구라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영화의 이미지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은 보여지는 공간보다 더 많고 그러기에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공간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드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프레임에서 쫓겨 난 다혜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현실의 다혜는 전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현실의 인공은 처음에만 얼굴을 보여줄 뿐, 시나리오 속의 인물이 된 후 현실에서는 춘희와 철수의 대화 속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춘희와 철수가 사는 세계 속에서 인공과 다혜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영화를 본다. 영화의 화면에서는 사라졌지만 영화 속의 세계 어딘가 에서 전화를 거는 다혜를 상상한다. 우리 눈앞에 그들은 부재하지만 여전히 영화의 어느 곳에선가에 살면서 그들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러한 우리의 순진한 믿음은 영화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영화는 비워져있는 이 공간들을 채우는 관객의 상상력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영화가 상상적인 것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감추어져 있는 이 공간 - 외화면(hors-champ)이라고 부르는 - 때문이다. 외화면은 믿음의 공간, 상상의 공간이다. 영화의 담론은 무수한 외화면의 공간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읽혀진다.

춘희와 철수는 창문 앞의 멋진 전망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들에게 보여지지 않는다. 춘희 방의 창문 밖 전경은 어떤 것일까? 둘이 멋있다고 말하는 과천의 동물원과 미술관의 갈라지는 그 길 앞의 전망은 또 어떠할까? 춘희가 구두 가게 앞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구두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철수와 춘희는 우리에게 그곳들의 멋진 풍경과 모습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곳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여주지 않는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더욱 보고 싶어지고, 부재 하는 것은 더욱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시나리오 속의 다혜가 인공을 생각하며 내다보는 창문의 전경은 숨겨진 화면에 대한 얼마나 탁월한 비유인가! 그곳, 다혜가 바라보는 그 창문 앞에는 아무 것도 없는, 하얀 막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비어있는 스크린, 영화의 빈곳이다. 그곳을 보며 사랑하는 인공을 생각하는 다혜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화의 공간 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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