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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미술의 아이덴터티    - 서기문(42)


2000년 벽두에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은 초대전 <백남준의 세계>로 새천년을 열었다. 전시회는 그대로 서울로 옮겨져서 로댕갤러리와 호암갤러리에서 나누어 전시(7.21-10.29)되었다. 로댕과 호암에서 백남준예술의 결정체들이 전시되고 있던 거의 비슷한 시간대, 또한 같은 공간에서는 <미디어-시티 서울 2000>전으로 한동안 북적거렸다. 과장한다면, 2000년 후반기 서울의 미술은 비디오나 레이져, 컴퓨터 따위 미디어미술 밖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테크놀로지는 부단없이 자기갱신과 확장을 거듭하면서 삶의 조건은 물론, 미술의 조건도 변화시켜왔다. 미디어아트의 성립은 그런 배경에서 이루어졌고 오늘에 이르러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형식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구겐하임미술관이 2000년의 첫 초대작가로 백남준을 선정한 것이나, 서울시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시민을 위한 첫 문화예술축제로 미디어아트를 선택한 것은 모두, 21세기에 있어 매체미술의 위상과 중요성, 그에 대한 인정이며 인식의 표명인 셈이다. 50여명에 가까운 국내외 정상급 미디어아티스트들이 펼쳐보인 <미디어 시티서울 2000>전은 당연히 비디오작품이 압도적이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결국 비디오아트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시이기도 했는데, 이는 미디어아트의 헤게모니가 아직까지는 비디오에 있음을 반영한다. 그런 맥락에서 백남준 예술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하는 일이 얼마쯤은 의의있는 일로도 여겨진다. 창시자면서 동시에 그것을 예술의 한 쟝르로 확고히 정착시킨 장본인으로서, 비디오아트에 있어 그의 무게나 지위는 거의 독보적이니까. 그러나 이 시점에서 거장에게 필요한 건 칭찬이나 예찬은 아닐 것이다. 격려란 일어서는 작가들에게나 절실한 것. 이미 하나의 세계에서 정상에 오른 대가에게는 예리한 비평적 관점들만이 진정으로 필요한 일이다. 비평적 관점들에서 떠오른 이런저런 약점들을 보완하는 일. 자기 예술세계의 정리 내지는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만년의 예술가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더구나 필요치 않다. 정확한 준거 속에서 이뤄지는 따뜻한 비평은 그러나 그의 명성을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이후 먼 훗날의 미술사에까지도 길이 존속시키는 쓴 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고 그에 따른 기술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미술의 영역을 확대해가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정열. 노환에 들어서도 그의 아방가르드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나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매체탐구 측면이 아닌 예술철학의 입장에서도 그의 아방가르드는 과연 건재한가? 이 글의 논지는 처음에서 끝까지 바로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예술철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플럭서스로부터 출발해서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는 그 아방가르드 문맥 속에서 그가 아방가르드로서 어떤 이탈과 후퇴를 보이는지, 그런 것에 글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에피소드로부터

백남준의 환상적인 콤비로 널리 알려진 샤롯 무어맨Charlotte Moorman. 이 예술적 동반자와 백남준은, 음악과 섹스의 결합을 시도하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수차례 치른다. <성인만을 위한 첼로소나타 제1번>과 <생상스를 위한 변주곡>에 뒤이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그 이색적인 에로티카 공연은 관객동원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무어맨의 체포라는 사건으로도 아주 유명하다. 제 3장의 '아리아'에서 하반신을 벗고서 연주를 하던 무어맨. 4장에 이르러 더욱 과감하게 전라(全裸)의 상태로 연주를 하다 급기야 경찰에 연행되어가고 말았던 것인데, 이 사건에 얽힌 후일담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이내 예술과 외설 시비가 뜨겁게 쟁점화되고, 결국 법정에서 '표현의 자유’ 쪽에 손을 들어주므로써 백남준과 무어맨 두 사람은 일약 뉴욕 문화계의 스타가 되는데, 그런 와중에서 그들에게 재밌는 제안이 들어온다. 우리 나이트클럽에 출연해주신다면 현찰로 5천 달러를 주겠소 하는, 샌프란시스코 어느 유흥업소로부터의 프로포즈였다. 미술계나 연극계 혹은 방송국 따위 문화 관련단체나 부서가 아닌, 그들을 청해온 곳이 나이트클럽이었다는 점에서 이 일화는 확실히 따끔하다. '섹스트로니크' 를 근엄한 예술행위로 인식했다면 유흥업소에서 과연 그럴 수 있었겠는가. 물론 가볍게 웃어넘기면 그뿐일 이 에피소드는 그러나 쇼와 예술사이 혹은 엔터테인먼트와 아트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느끼게 하면서 끝내, 오락과 예술의 차이를 질문하게 한다. 하긴 백남준예술에서 한 번쯤은 반드시 진지하게 거론되어야 할 그런 물음이기도 하다.

오락과 예술 사이, 그 기본적인 차이를 제시하는 일은 쉬울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로서 결코 쉽지만은 또 않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대중예술을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그 발아기에서부터 쟁점이 된 문제기도 하다. 대중주의를 표방하던 60년대의 그 포스트모더니즘과 섞이면서 같은 배를 타게 되었던 아방가르드. 더구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이 물음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비디오는 또한 과학기술이 생산해낸 예술형식이라는 점에서, 기술인가 예술인가 하는 그 물음마저도 시원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오락과 예술, 혹은 기술과 예술의 차이에 대해 그러나 그렇게 꼭 어렵게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작업의 궁극 지향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백남준처럼 대중매체를 가지고 다분히 유흥적인 요소의 접목을 시도했던 사람도 그것이 예술의 대중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를,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변별력은‘지향점’에 둘 수밖에 없고 그건 또 결국,‘작가의식’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얼마든지 흥미로운, 또는 기술적으로 정교한 예술작품도 가능할 일이다. 작업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오락적, 혹은 기술적 측면이나 기능쯤은 필요한 만큼 빌려다 쓰면 그만인 것이다. 요는 작가가 철학을 갖고서 그 흥미거리라든가 기술적 측면을 의식적으로 주도하는 것, 그게 단지 중요할 뿐이다.

예술철학이라고도 혹은 자기예술의 정체성Identity이라고도 말해질 수 있는 이 작가의식의 내용은 그런데 극단적으로는, 예술가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터다. 의식이 묻어난 작업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그 어떤 것도 '의식'으로 치장될 소지는 다분하다. 이‘의식’을 검증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로‘문맥Context’을 제안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락물의 경우 제작자의 유일한 관심은 흥행에 있다. 얼마나 많은 관객의,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아낼 것인가. 상업적인 관심이 있을 뿐으로 일회성의 특징을 갖는다. 물론 동일 테마의 시리즈물도 있을 수 있으나 시청률여부에 따라 제작자가 언제든 교체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1회성 제작물 이상의 의미를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방송프로듀서의 경우 의식은 가질 수 있으나 자기작업에 문맥을 가질 수 없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의 작업은 확연히 차별화를 갖는 것이다. 의식을 갖고서 임하는 작업에는 분명‘이전’과‘이후’작품 사이 반드시 문맥이 형성되어 있는 법이니까. 문맥이란 텍스트 전체의 큰 흐름이면서, 전후문장의 관계이기도 하다. 아티스트에게 텍스트 전체의 큰 흐름이란 미술사를 지칭하는 걸 거며, 전후문장 간의 관계란 자기작품에서의 문맥을 일컫는다 할 수 있다. 푸생N.Poussin의 고전적 인물화에서 마크로드코의 색면회화까지 오는 데는,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하면서도 끈끈한 미술사의 그 문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문맥이란 또한 개인적이기도 한 것이다. 절대추상을 하던 말레비치K.S.Malevich가 소비에트공화국의 압정에 의해 일시적으로나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해야 했을 때 굴욕감같은 것을 느껴야했던 것도 그것이 다 자기 문맥에서 이탈한 예술행위였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호구역인가?

백남준예술은 우선 미술사에서‘플럭서스’라는, 1960년대 그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의 문맥을 타고 시작된다. 그러니 플럭서스는, 그의 의식이나 예술철학을 지배하는 예술적 사상의 근원인 셈이다. Fluxus(흐름)라는 단어적 의미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 플럭서스는, 흐름이 이미 멈춘 굳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즉 인습적인 권위나 전통 따위에 대항했던 60년대의 대표적 아방가르드 그룹이다. 기존의 예술이나 문화 및, 그것이 만들어낸 모든 기구에 대해서까지 불신하는 과격한 반예술적 반문화적인 전위운동. 극단적인 가치에 흥미를 느끼고 오직 새로움만을 갈망해온 백남준으로서는 충분히 의기투합을 느꼈고, 이내 거기에 가담하게 된다. 음악의 근원을 질문하며 전통적 음악의 개념에 도전하여 놀랄 만한 혁신을 불러일으켰던, 플럭서스의 대부격인 죤 케이지John Cage. 그와의 만남으로 백남준의 전위적 특성은 이미 고무될 대로 고무되어 있기도 했다. 아방가르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던 플럭서스 초창기. 그는 오직 무언가를 깨뜨리고 박살내버리는 일만이 유일한 사명인 것처럼 굴었다. 바이올린을 산산조각내놓는가 하면, 피아노를 도끼로 패서 파괴하는 일이 그 무렵 그의 해프닝의 단골메뉴였으니까. 미친 짓에 가까운 어처구니없는 도발행위를 통해 백남준이 발언하고자하는 바는 물론, 전통적인 것에 대한 준엄한 도전 그것이었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가 무엇인가? 음악인에게 있어 신성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악기들이 아닌가. 그것들은 그러니까 일종의 거친 메타포로서, 맹목적으로 따르는 전통이나 인습 고정관념은 말할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 과거의 경직된 형식은 물론 현재의 제도권, 이미 견고하게 조직되어 막강한 카리스마를 행사하는 곳곳에 산재해 있는 그 권력집단 등등 적어도 그런 것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플럭서스 아방가르드는 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고 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섞이면서 적극적으로 대중주의까지를 표방하게 된다. 그린버그C.Greenberg로 대표되는 미국의 모더니즘. 그러니까 삶과 대중을 예술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버린, 저 난해하고 절대적이기까지 한 그 고급미술에 대항하여‘예술과 삶의 통합 내지 소통’을 시도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은 플럭서스의 예술철학과 일치했고, 플럭서스 해프닝은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 가장 적절한 예술형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더구나 매체의 순수성이며 장르간의 독립성을 종교적 도그마처럼 신앙하던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 반해, 해프닝은 그 자체의 속성에서 이미 장르의 정체성이 깨져있는 것이기도 했다. 해프닝이란 게 음악과 미술 연극 따위가 뒤섞여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행위예술로서, 애당초 복합매체 내지는 다종의 쟝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백남준은 처음부터 장르적 제한에서 아예 자유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야 본래 음악을 했던 사람이고, 그의 미술의 시작 역시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위음악에서 비롯되고 있었으니까. 플럭서스 후기에 이르러 그의 해프닝은 비디오아트 영역으로 이전되는데, 그 첫 전시의 제목에서도 그가 음악과 미술의 경계에서 자유로왔던 예술가임은 여실히 드러난다. <음악의 전람회: 전자텔레비젼> 전시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 음악과 미술 양쪽에 기대어 두 가지 제목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이 전시회는, 그런데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백남준의 예술이 미디어미술, 즉 그의 예술의 중심인 바로 그 비디오미술로 돌입했다는 것과, 미술사에 있어 그 전시회가 비디오미술의 기원으로 잡히는 아주 중요한 전시였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비디오로 작업영역이 전환되면서, 그리고 활발하게 작업이 전개되면서 그의 예술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만큼은 또 후퇴를 보인다. 후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면‘이탈’이라는 차선의 어휘를 동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비디오아트는 작업양식상, 설치작업ㆍ테이프작업ㆍ인공위성방송작업 그렇게 세 범주로 대별해볼 수 있는데 우선 설치Video Installation의 경우,‘수상기의 조각적 구성’과 더불어 각각의 모니터에 반영되는 '영상이미지의 창조’바로 그 두 가지 서로 다른 작업의 조합이 특징을 이룬다. 이러한 이중적 참여 효과 때문에 존 한하르트J.G.Hanhardt 같은 사람은, 백남준의 비디오조각이야말로 그의 전 작업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단언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965년에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개발되어 시판된 이후 비디오미술은 크게 오브제예술에서 테이프작업으로 전환되는데, 백남준은 이후에도 줄곧 고집스럽게 테이프작업은 물론 테이프를 병치시킨 그 설치작업을 계속해나간다. 비디오카메라를 누구보다도 앞서 구입하여 가장 최초로 <전자비디오 레코드>라는 작품을 남긴 사람이었음에도. 어쨌든 설치작업에서 후자의 ‘영상이미지창조’는 내부회로를 변경시켜 특수한 시각효과만을 창출하던 백남준 비디오미술의 초창기와는 달리, 캠코더라든가 비디오 신디사이저 등의 발명품과 함께 전자적 현란함이 가미되면서, 갈수록 복합적이고 무제한적인 이미지의 양상을 띤다. 더불어 조각적 오브제 역시 점차 스케일 면에서 대규모 스펙터클을 지향하면서 작업의 확대를 보여왔다. 48개의 수상기로 피라미드로 쌓은 <비라미드Vramid, '82년>. 50개 수상기가 하나의 거대한 사다리 꼴을 이루어놓는 <보이스/보이스, '86년>. 그리고 그의 작업은 급기야 1003개의 수상기로 탑을 쌓아올린, 비디오예술의 금자탑이라고 한편 평가되기도 하는, 그 거대한 조형물 <다다익선, '88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후퇴라 함은‘미술가가 생계를 위해 만들고 판매하는 비실용적 일용품으로서의 미술-오브제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그의 예술철학의 기저를 형성하는 그 플럭서스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작품으로 영원히 고정되지 않는 비물질성, 그건 플럭서스인들이 해프닝이나 비디오의 방식을 환영했던 이유중 하나였을 거다. 공연이 끝나고 이내 해체되어버리는 해프닝이야 말할 것도 없겠고, 작업후 비디오테이프 하나만 남게되는 비디오미술 역시 다분히 비물질 언어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전통미술에서 미술적 근거의 하나로서 제시하고는 하던 그 '유일한 것Originality'의 측면하고는 상반되게 비디오테이프는 대량복제와 함께 대중보급마저 가능하여 예술의 대중화라는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 수행에 가장 적당한 매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 이상 미술을 시각적 개념에 두지않고 인식론적 개념으로 두고 싶어했던 개념미술. 고정된 작품보다는 텍스트만을 제시하고자 했던 그 개념미술처럼 미술의 개념을 한 차원 진보시키고 있던 비디오미술. 바로 그런 맥락을 거스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설치작업은 확실히 후퇴인 것이다. 비디오조각이야말로 명백한 오브제미술이기 때문에. 결국 1960년대의 아방가르드나 보수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범했던 자기모순을 백남준미술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장식과 은유, 형상과 서사성, 역사로의 복귀 따위 이른바 '보수’라는 것을 가지고 모더니즘에 도전했던 그 빈곤한 보수적 포스트모더니즘. 그들이 대중주의와 양식적 절충주의를 표방하면서 이내 상업화 제도화되어버렸던 것처럼 백남준 역시, 그가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제도권미술과 타협하고 말았던 건 아닌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비엔나며 뮌헨, 동경,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할 것 없이 그의 설치작품들이 세계 유수의 현대미술관 곳곳에서 전시되거나 소장되어온 사실을 상기하면서.

또 한 가지 자가당착 내지 후퇴의 측면은 비디오미술 자체의 장르적 속성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탈장르적 속성이 강한 해프닝같은 것에 비한다면 비디오 아트는 확실히, 장르적이라 할 수 있다. 비디오라는 단일 매체를 이용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때 비디오아트는 타 매체와 정확히 구별되면서 독특한 자기만의 예술언어를 확보하고 있는, 즉 비디오설치작업의 그 오브제쪽이 아닌, 비디오미술의 순수본령이라 할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작업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순수매체로서의 비디오’란 측면에서 비디오미술은 또한 확실히, 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비디오아티스트 중에서도 특히 백남준의 경우가 모더니스트의 경향이 강한 작가로 언급되기도 한다. 백남준이나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에 의해 시도되었던, 초창기 비디오아트를 대변하는 <장치된 TV>. 그건 실은 안티(反) TV의 개념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명제가 상업텔레비전과 예술비디오를 구별해놓으면서 오히려 저급/ 고급, 미학/정치 따위 이분법을 강화하므로써 도리어 비디오의 모더니즘화를 촉진한 감도 없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다. 보통 비디오캠코더를 가지고 작업하는 비디오예술에는 사실기록에 치중하는 다큐멘타리비디오에서, 일정한 플롯이나 줄거리를 갖는 내러티브비디오, 여성문제를 주제화한 페미니즘비디오, 행위예술의 용기(用器)로서 이용되는 퍼포먼스비디오에 이어, 비디오라는 전자매체의 그 독자적인 속성에 주목하여 영상미라든가 순수 전자이미지를 조형화하는 그래픽비디오 등이 있다. 백남준이 몰두를 바쳤던 마지막 항목의 비디오그래피. 물론 모든 비디오가 다큐멘타리 비디오에서 시작되듯 그 역시도 출발은 다큐멘타리로 하고 있다. 하지만 비디오의 사실적인 언어에만 머물러있기엔 체질적으로 그는 실험적 미학적 충동이 너무나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디오의 기능을 점점 조형적인 형식미학쪽으로 발전시키면서 전자 이미지의 추상화까지를 추구해나갔다. 그의 방향은 물론, 시적이고 환상적인 화면으로 영상미를 추구하면서 차라리, 상징적인 비디오의 시를 쓰고자 했던 빌 비올라Bill Viola 류의 비디오그래피하고도 또 달랐다. 기술자 슈야 아베와 함께 신디사이저 바로 그 합성기까지를 직접 제작한 사람답게 그는, 자신의 비디오언어를 합성이나 변형, 조작 따위 이미지제조Image Processing에 두었다. 그는 가능하면 텔레비전의 사실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예술적으로 새롭게 재구성된 독특한 자기만의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했다.

비디오 이외의 타매체, 일테면 사진이라든가 영화, 문학, 회화 등으로도 얼마간은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즉 매체의 형식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내용을 보조하는 수단으로서의 여타의 비디오미술. 기록이라든가 소통 따위 예술외적인 부분에 더 치우치는 감도 없지 않은 그들 사회적 정치적 성격이 묻어나는 커뮤니티 비디오에 비하여 백남준의 이미지프로세싱은, 비디오가 아니면 안되는 비디오만의 독특한 물리적 속성에 집중하여 형식적 추구쪽에 분명 더 많은 몰두를 보여왔다. 맥루한M.McLuhan의 매체 자체가 메시지라는 그 전자비전의 견해마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비디오자체 언어의 특성이나 효과를 높이는데 최대 관심을 두어왔던 백남준. 그런 점에서 그의 비디오는 미학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또한 다분히 모더니즘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타리나 내러티브 쪽의 그 리얼리즘 계통하고야 전혀 거리가 멀고 페미니즘처럼, 포스트구조주의와 섞이면서‘해체’며‘탈구조’'비주류’니 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새롭게 대두되었던 70년 80년대의 그 저항적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백남준의 비디오는 정말, 모더니즘인가? 지나치게 경도된 매체의 본질적인 탐구나 기술적인 형식미학의 천착이야말로, 내용이 결핍된 모더니즘회화의 그 지긋지긋한 형식주의 노선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거야말로 예술이라는 궁극적 지향점 이외에 어떤 것도 불허했던, 해서 예술로부터 인생과 세계를 떼어내버렸던 그 고급미술로서, 그의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의 첫 번째 공격대상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삶과의 소통 내지, 삶의 연장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반모더니즘미술로서 기능했던 그의 예술은 이제 완벽한 자기모순에 직면해버린 것인가. 그의 예술이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 것인가? 과연 그런가?

물론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우선 비디오라는 게 그렇듯 단순한 매체가 아닌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비디오는 실은 포스트모던 아트의 대표적 실천 매체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소리 자막 등이 동영상으로 하나의 화면에서 믹싱되는 그 혼성hybrid적 측면, 즉 그 자체 복합매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러하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그 비고정성하며, 이미 그 속에 개입되어 있는 시간성. 전자의 탈물질성. 그리고 비디오가 갖는 민주적 매체로서의 그 소통성 따위로 비디오는 또한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과 만나고 있다. 60년대의 보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용행위에 대해 당대의 언어로 당대의 현실을 표현할 능력이 고갈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 바도 있던 그, 포스트모던 문화의 대표적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그이마저도 그래서 비디오에 대해서는 현재의 포스트모던 사회문화 구조에 가장 적합한 시청각매체일 뿐만 아니라,‘원작없는 복제’로만 존재하는 테이프 녹화 메커니즘에서도 명백한 포스트모던 특성을 부여받는다 고 했던 것이다. 비디오란 그러고 보면 속성적으로, 모든 걸 수용하는 참으로 편리하고 유리한 매체인 듯도 싶다. 더구나 백남준 특유의 비디오언어인 현란한 색채와 율동감, 이미지 클립방식의 속도감 있는 영상,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의 빠른 교차며 반복, 왜곡, 그리고 이미지의 파편화로 인해 형성되는 화면의 해체적 도상 등등, 그것들은 해체니 탈구조니 탈중심이니 하는 그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와 전적으로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비디오는 적어도 양식적인 측면에서만큼은 또 모더니즘을 모두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문제가 되고 있는 의식적인 측면에서도, 그가 아방가르드의 문맥을 아주 놓아버리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지난 10년간의 나의 작업은 관객의 참여를 위한 노력으로 일관되어 왔다 는, 백남준 자신의 그 말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듯 그의 작업은 줄곧, 아니 어느 시기까지는 분명‘관객참여’라든가‘소통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지향점 속에서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플럭서스 해프닝시기야 말할 것도 없고, 프리비디오시기인 60년대를 걸쳐, 본격 비디오시기인 이후 상당 기간까지도 그는 이 예술정신의 맥락에 꽤 충실한 편이었다. 텔레비전의 내부회로를 조작하여 방송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관객으로 하여 직접 자석을 이용해 모니터에서 변경되는 다양한 패턴의 추상이미지를 경험하게 한다던가 하는, 프리비디오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업이었던 그 <장치된 TV>들. 그때만 해도 그의 표적은 오로지 대중문화의 우상이던 텔레비전이었고, 그의 목표는 그 TV를 제어하고 억압하는데, 즉 그것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데 있었다. 반(反)TV, 참여TV, 대리TV로 달리 불리는 그 작업의 시기를 지나 본격 비디오 시기에도 그의 표적은 여전히 텔레비전이었고,‘TV의 대안으로서의 비디오’에 이제 그의 의식은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정보를 독점하고 독점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텔레비전의 그 중앙집권적 체제며 일방성에 비해, 반복시청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편집기능이 가능할 뿐더러 아예 수용자가 제작주체로까지 개입할 수 있는 비디오. 대단히 민주적이며 상호적인 메커니즘, 바로 그 비디오의 매혹적인 쌍방성에 주목하고서 부정적인 텔레비전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20개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천장에 매달고서 바닥으로 향하도록 설치한 <물고기 하늘을 날다 Fish flies on sky '76년>. 이 작품만 보더라도 그가 그의‘참여’문맥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관객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바꿔놓고 있고, 여러 장면을 동시에 보게 만들므로써 시지각적인 면에서도 새로운‘참여TV’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또한 <비디오코뮌Video commune>이나 '72년의 <뉴욕의 판매 The selling of new york >, 77년작 <과달캐널진혼곡 Guadal canal requiem>과 같은 테이프작업에서는 풍자적 모방을 통해 광고문화로 대표되는 상업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가 하면, 역시 풍자와 은유한 언어로 문화와 이념사이에 따른 지역적분쟁을 고발하는 등 아방가르드로서의 사회비판 기능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비디오를 소통혁명의, 혹은 사회변혁의 도구로서 활용하고자 했던 60년대의 언더그라운드나 70년대의 게릴라, 이후 페미니즘 등 그 커뮤니티비디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커뮤니티 그룹들을 비디오미술의 비주류내지 변방으로 떨어뜨리는 데 있어 절대적인 배경마저 제공하고 만다. 비디오예술의 중심축으로서 그 예술을 선도했던 백남준, 그의 노선이 앞서도 언급했듯 매체의 형식미학쪽이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의 사회적이며 행동적인 철학마저 차츰 거대한 제도권미술과 타협을 보이면서 그는, 결국 부르주아제도권으로 편승하는 듯한 인상마저 남기고 만다. 그런 다음 그는 최대의 시기인 1980년대의‘인공위성을 통한 생방송 작업시대’를 맞는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둔,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궁지에 몰릴 여지가 충분히 있는, 바로 그 위험한 선택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이른다.

TV부정에서 TV긍정으로

죠지오웰의 소설 제목과 일치하는 1984년, 그 시간대가 갖는 이벤트성에 유의하여 작품을 착안한 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가 <1984년>의 소설내용을 굳이 180도로 역전시키고 나섰던 것에 대해선 솔직히 여러 가지로 회의적이다. 24시간 줄곧 텔레스크린에 감시당하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드를 통해 음산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는 오웰. 감시와 통제사회의 수단으로 TV(텔레스크린)를 묘사하면서 곧 닥쳐올 기술 정보사회의 결정적 위협과 함정에 대해 경고하고 있던 그 문명사회 고발작가에게 그런데 백남준은 그 해 아침, 마치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듯 소설 <1984년>을 타켓으로 삼고 나선 것이다. 하이테크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그의 야심만큼이나 화려하고 현란하게 펼쳐졌던 거대규모의 위성쇼. 여러 개의 퍼포먼스와 현장출연자들이 무수히 화면에서 병치되면서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나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제작자의 의도인‘TV의 소통의 기능이나 정보중개자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선전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건 TV축제였다. TV에 대한 찬양, 그것은 오웰의 역전이기도 했지만 백남준 그 자신의 예술태도 및 예술철학의 완전한 역전이기도 했다. TV네가티브에서 TV포지티브로의 선회. 적어도 그건 영합일 수 있었으며, 그에게서 플럭서스 정신의 실종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편에선 여전히, 그의 예술의 유일한 일관성으로 보고있는 그‘소통과 참여’문맥에서 의의를 찾으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통은 그의 아이디어에서 창출되는 비디오의 예술적 효과라기보다는 인공위성이나 방송자체의 소통의 기능인 거고, 또한 참여의 문제 역시도 마찬가지다. 즉 방송에 있어 오직 참여의 측면만을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여타의 오락프로에서도 그 만큼의 관객참여는 얼마든지 유도해낼 수 있을 터이다. 아니 규모나 경제성까지를 고려한다면 울고 웃기기를 마음대로 하는 엔터테이너들, 그들이 이끌어내는 참여도가 더 높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굳이 그렇게 소란을 피우지 않고서도, 그러니까 방송의 오락기능만으로도 그 정도의 참여의 기능은 거뜬히 감당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예술가에게는, 특히 플럭서스 출신의 아방가르드인 백남준같은 예술가에게는, 달리 그에 준하는 특별한 사명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참여시키되, 상업방송 제작자와는 변별력을 갖고서, 곧 '사회비판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면서 관객참여의 문맥을 확보해달라는 바로 그 요구 말이다.

1984년. TV가 문화의 지배적인 힘으로 더욱 확고하게 확립되어가던 그 시기. 어느 때보다도 TV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더욱 높였어야 마땅한 그 시점에서 그런데 백남준은 도리어, 문화권력과의 완벽한 제휴라도 선언하는 듯 보였다. 일정한 정보를 그들의 이익에 맞춰 교묘하게 각색하면서 진실을 조작하는 방송폭력이라든가 오웰이 지적한 사생활감시 따위, TV가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이없게도 그것의 순기능쪽에만 손을 들어줘버리고 있었다. 자연인으로서의 나이도 50대 중반을 치닫고 있던 완숙한 시기. 그건, 통속적인 성공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자기 예술의 문맥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선택과 함께 그가 그에게 요구되는 아방가르드로서의 사회비평기능까지를 놓아버리고 있을 때, 그의 관객들은 그들의 기대를 절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에게서도 보고싶었던, 그러니까 그의 플럭서스 친구들인 죤케이지나 요셉보이스가 걸어갔던 길, 즉 그들이 보여주었던 예술사상가로서의 바로 그 아름다운 모델을.

거장에게 바치는 조용한 제언

짧은 시간 비디오미술은 프리비디오시대와 비디오시대를 거쳐 어느새 ‘포스트비디오’라는 용어까지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물론 후기비디오라는 이 용어의 제조도 백남준에 의해 이루어졌다. 속성적으로 융통성과 진화성이 강한 매체로서 꾸준히 자기확장이 가능했던 비디오. 이제 그것은 컴퓨터와 만나서는 컴퓨터비디오가, 레이저와 만나서는 레이저비디오가 되는 따위 비디오아트 내부에서도 장르적 확산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포스트비디오란 개념적으로, 확장된 비디오미술 그걸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백남준은 포스트비디오의 한 대안으로 끝내 레이저작품까지를 내놓았다. 대단한 저력이 아닐 수 없다. 소통이니 참여니 하는 의미부여 이외에, 그의 예술에 부여된 최고의 의미화가 또 하나 있다면 그건‘기술의 인간화 및 자연화’였다. 그저 TV를 정원에 설치한다고만 해서 기술의 자연화가 되는 것이며, TV브라를 만들고 TV로 인간로봇의 형상을 조합한다고 해서 과학의 인간화가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테크놀로지를 예술화해낸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거다. 비디오에 이어 레이저, 저 과학의 빛을 그렇듯 거뜬히 예술적으로 조형화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의 예술적 작업의 의의에 대해 함축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표어화가 필요하다면 기술의 인간화니 자연화니 하는 내용보다는‘과학의 예술화’쪽에 강조점이 맞춰지기를 희망한다. 다시 레이저로 돌아가서, 그는 정말 레이저를 작품화하면서 레이저아트까지 성립시키고 있다. 건강과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는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것을 탐닉할 것이다. 그에게 이 시점에서 그러나, 꼭 새로움이 필요한 건가를 감히 묻고 싶다. 어쩌면 현시점에서 대가에게 요구되어지는 건 새로움이 아닐 지 모른다. 솔직히 새로움은, 이미 지나치게 충분했다. 작업의 내면화 내지는 심화. 그에게 진정으로 요구되어지는 건 새로움이 아닌 바로 그 깊이일 것이다. 비디오 미술의 문맥을 공고히 다지는 일. 그의 예술에서 미완감을 주는 대목들을 보완하고 보강하는 일에 그의 남아있는 아까운 시간들은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이면서 또한 세계인인 백남준. 모더니스트이면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이면서 그 모두의 통합이기도 한 백남준미술. 그의 정체성을 대변함에 있어선 그가 곧잘 얘기하는 그 비빔밥미학이 가장 적절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멀티미디어처럼, 비빔밥처럼, 많은 걸 뒤섞고서 그 모든 것에 속해있는 그의 예술. 그러나 거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한편,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위험 또한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지일관이란 쉽지 않다. 물론 예술에서 처음과 끝이 굳이 똑같아야할 이유는 더구나 없다. 예술이야말로 새로움과 변화를 요구한다. 예술가는 늘 새로움에 도전해야하며 변화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변화하되 논리를 갖고서, 문맥을 갖고서 변화했을 때라야만 그 예술의 변화는 설득력과 생명력을 지닌다. 아무런 논리적 맥락없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변화는 그의 예술을 가볍고 산만하게만 만들 뿐이다. 자기예술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할 만년의 거장 백남준. 그가 그토록 험악하게 바이올린이며 피아노 따위를 때려부수던, 바로 그 자기미술의 시작점을 그윽하게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말을 잘하고, 기지가 번득이면서, 메니지먼트에도 강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우리의 예술가 백남준. 그러나 세월은 흐른다. 그의 예사롭지 않은 말이나 글, 메니지먼트가 먼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세계미술계의 유력한 인사들로 구성된 그의 친구들도 사라진다. 방송인이나 기업인 따위 그의 막강한 후원자들 또한 모두 사라지고 오직, 그의 작품만이 다음 세대 미술사가들에게 덜렁 남겨지게 될 그 오랜 뒷날. 백남준은 그들 미술사가나 비평가들의 평가로부터 과연 현재의 영광 그대로를 누릴 수 있을까. 대가의 미술을 두고서 지금은 진지하게 그런 것들을 생각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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