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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찾아 남으로 아들 구하려 북으로 그녀의 가족사, 분단의 눈물로

아버지 찾아 남으로 아들 구하려 북으로 그녀의 가족사, 분단의 눈물로

Posted July. 02, 201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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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연 탈북여성 박인숙 씨는 황해북도의 한 산골에 끌려간 아들 부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재입북한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서울에서 노트 2권에 자필로 남긴 수기와 일기, 사진 등을 지난달 29일 단독으로 입수했다.

박 씨의 일기에 따르면 아들 때문에 상심했던 박 씨는 2010년부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고민해왔던 것으로 나타났다. 아들에게 죄책감을 가진 애끊는 모성이 일기와 수기 곳곳에 드러났다.

너(아들)에게 죄 짓는 내 인생을 용서하(해)라. 중국에 와서 아버지 만나 돈(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그만 이성을 잃고 넘어왔다혈육을 다 버리고.

내 아들(을) 망가뜨려 놨는데 사돈님께 미안하고 며느리와 분이(손녀로 추정)에게 지은 죄, 눈물이 바다가 된다.

박 씨의 수기와 일기에서는 그가 다시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압력을 받았다는 정황은 드러나지 않는다. 박 씨의 지인들도 그가 보위부의 협박에 의해 돌아간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결국 박 씨는 자신이 북한 당국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아들이 복권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들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목숨을 건 셈이다. 박 씨는 2005년 탈북 과정에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된 뒤 보위부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도 기어이 재탈북했지만 자신의 탈북 사실이 드러나 전도유망한 음악가였던 아들이 2008년 추방되자 이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의 결단 뒤에는 월남자의 딸로 살면서 북한 체제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개인적 과거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 씨가 짬짬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수기에는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 분단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 2만4000여 명 탈북자 시대의 남북의 자화상 등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다.

수기에 따르면 박 씨는 625전쟁 시기 월남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한 아들을 뒷바라지해 주기 위해 북한을 탈출했다.

그의 아버지는 광복 전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다. 광복 후 청진의과대학장이던 박 씨의 아버지는 1950년 당시 6세이던 박인숙을 등에 업고 피란길에 올랐다가 국군에 강제 징집돼 가족과 헤어졌다. 박 씨의 아버지는 이후 국군 군의관으로 시작해 서울에서 유명 의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북에 5남매를 남겨두고 온 그는 남쪽에서 재혼해 다시 2남2녀를 낳았다. 막내아들은 한나라당 출신 3선 국회의원이다.

북에 남은 박 씨의 가족은 월남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갖은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 박 씨는 학교에서 8년간 최우등생이었고 군 수학올림픽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은커녕 야간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음악대학에 가고 싶어 평양의학대학 학장까지 찾아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이사를 갈 때 헤어지기 아쉬워 눈물을 흘렸던 친구들이 모두 민청(당시 청년단체)에 불려가 반혁명적 행위를 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박 씨는 1964년 함북 청진 나남제약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낳아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2001년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이 13년간 군 복무를 마친 뒤 박 씨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평양음악대학에 입학하자 그는 남쪽의 아버지를 찾아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결국 탈북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2006년 서울에 도착해 찾은 아버지는 의식이 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끝내 56년 만에 딸이 찾아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20여 일 뒤 95세로 숨을 거뒀다. 아버지의 재산은 박 씨에게 한 푼도 상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 씨의 지인들에 따르면 박 씨는 이복형제들의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한 번도 가족모임에 참가해 본 적도, 작은 금전적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는 것. 박 씨는 아버지의 재산을 분할해 달라는 소송도 생각해 봤지만 국회의원인 이복동생이 피해 볼 것을 우려해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수첩에는 북한에 돌아가 진술할 예상문답이 적혀 있었는데 북한 당국에 국회의원인 이복동생의 존재를 자백할지 안 할지를 고민한 내용이 첫 번째로 적혀 있다.

박 씨는 서울 송파구의 한 임대주택에 살면서 지하철 청소원, 노인 간병인 등의 직업을 얻어 어렵게 살았다. 지난해 2월에는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 아래 큰 허물이 남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지만 어느 정도 회복된 뒤에는 다리를 절면서도 90세 노인의 간병을 다니기도 했다.

북한은 박 씨의 귀환을 김정은식 은덕정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주민들의 탈북 의지를 꺾을 좋은 호재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평일에 불과 6시간 방영하는 조선중앙TV를 통해 무려 1시간 13분간 박 씨의 기자회견을 내보내는 파격을 선보였다.

북한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도 1일 그를 성경의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면서 극적인 인생과 더불어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는 저 화폭 앞에서 감히 누가 북 인권에 대해 떠들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장에는 추방지에서 고초를 겪고 있던 아들과 딸도 함께 참가했다. 박 씨의 모험은 그가 북한 당국의 선전용 제물이 되면서 일단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박 씨의 일기 속에 묘사된 남한은 그가 기자회견을 통해 주장한 대로 사람 못 살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을 지옥에 둔 어머니에겐 어디든 천국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천국, 아들의 곁을 찾아 다시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기자는 6세 때부터 월남자의 자식으로 갖은 박해를 받았던 박인숙 씨가 말년이라도 아들과 함께 작은 행복이나마 누리길 바라며, 그에게 피해가 갈 부분들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주성하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