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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단의 벽을 넘어서

98년 6월22일 오후 북한 잠수정 한 척이 속초 앞바다 꽁치잡이 어선의 그물에 걸렸다. 예인 도중 줄이 끊어져 물 속에 가라앉는 바람에 인양하느라 한바탕 소동을 겪은 이 잠수정 안에서 승조원과 공작원으로 보이는 시체 9구가 나왔다
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에 이어 1년9개월 만에 재발한 이 사건은 햇볕론에 입각한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에 큰 걸림돌이 됐다. 정부는 일단 기존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다는 방침이었지만 북한의 도발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을 질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잠수정이 발견되기 엿새 전인 6월16일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보다 앞서 3월25일부터 3일간 중국 북경에서 남북적십자 3차 실무접촉이 있었고 4월에는 역시 북경에서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렸다. 이는 모두 햇볕정책에 따른 일련의 수순이었고 북한 잠수정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남북관계에 대한 보랏빛 꿈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 터진 잠수정 사건은 그동안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햇볕론은 딜레마에 빠졌다.
햇볕론과 관련한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시국제언은 바로 이런 시점에서 나왔다. 다음은 98년 7월24일자 1면에 실린 시국제언의 요지.
…햇볕론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름만 다를 뿐 보편적인 대북화해, 포용정책과 다름없다는 얘기다. 북한과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면서 북한이 스스로 개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정책에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햇볕론을 둘러싼 작금의 논쟁이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한 국력의 낭비일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우선 햇볕론이란 용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대북 화해, 포용정책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동아일보 발행인으로서 본인은 일관되게 북한을 우리와 동등한 실체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또 동아일보가 통일을 향한 남북간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동아일보가 92년 9월 중국 인민일보와 제휴협약을 맺었을 때 본인은 북한의 로동신문과도 빠른 시일내에 제휴가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도 있다.…

세계사의 흐름은 확실히 대결보다는 화해 쪽으로 가고 있다. 하물며 같은 민족끼리의 관계에 있어서랴. 비록 그 과정에서 무한한 인내와 고통이 뒤따른다고 해도 대북 화해와 포용이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갈망하는 이 시대 우리의 소명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 시국제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햇볕론이란 용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한승주(韓昇洲) 전 외무부장관은 동아일보 특별기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포장지에 쓰인 상품의 이름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햇볕이라는 틀 안의 여러 정책과 조치는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햇볕정책이라는 패키지 속에 넣고 그 내용보다 포장지를 선전하다 보면 내용물 자체에 대한 신뢰감마저 훼손할 수 있다. 정부는 어쨌거나 햇볕정책을 고수하겠다고 새삼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포장지에 쓰인 상품의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이 역작용을 할 때는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그에 대한 논쟁 때문에 내용물 자체를 희석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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