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종합미디어 사업으로> I. 새로운 도약> 2. 충정로 시대 page 1
 

2. 충정로 시대

1992년 10월27일 충정로 사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상 17층, 지하 6층에 건물 높이 80m. 당시 개발이 한창이던 서울 충정로에서는 제법 큰 건물이었다. 충정로 사옥이 선 것은 광화문 사옥이 완공된 때로부터 66년 만이고 첫 신문을 찍어낸 1920년부터 따지면 72년이 된다.
창간 이래의 꿈이었던 광화문 사옥이 준공된 것은 26년 12월10일. 그 해 3월5일 제2차 무기정간처분을 받은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었고 완공 이튿날 새 사옥으로 이주했다. 셋방살이 ‘화동시대’를 접고 ‘광화문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다음은 새 사옥으로 옮긴 날, 순 한글로 나간 사설 ‘새 집이 일다’의 몇 대목이다.
오늘 우리 동아일보는 낡은 집을 떠나 새 집으로 옮깁니다. 우리 신문이 창립된 지 7년동안, 매삭 120원짜리 구석지고 조그마한 셋집에서 협착과 싸우고, 불편과 싸우고, 구석진 곳과 싸우고, 여름이면 지글지글 끓는 더위와 싸우고, 겨울이면 벽틈과 마루밑으로 들이쏘는 찬바람과 싸우고, 게다가 판매금지며 발행정지의 액운과 싸우고… 오늘 서울의 한복판 경복궁 앞이요 옛날 육조 앞인 황토마루 네거리에 하늘을 찌를 듯이 뚜렷이 높고 철근 콘크리트로 불에도 아니 타고 지진에도 아니 무너지는… 이런 것들과 싸우던 힘을 모아 정의를 위하여 불의와 싸우고, 자유를 위하여 압박과 싸우고, 진리를 위하여 허위와 싸우고, 이천만 조선민중의 의와 복을 위하여 큰 싸움은 여전히 남아 있고…
광화문사옥은 이후 세차례 증축을 거듭하지만 계속 팽창하는 사세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했다. 72년 10월20일 여의도 별관 사옥이 준공된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던 충정로 사옥이 준공된 날 축하 리셉션에는 각계에서 1000여 명이 참석해 축배를 들었다.

 

…우리는 오늘 충정로 시대를 개막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선인들이 기틀을 마련한 광화문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충정로 시대의 사명은 광화문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역량을 축적하면서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 신문의 성가를 올리고 시대적 흐름에 맞춰 독자들의 다양한 정보욕구를 건강하게 충족시켜 나가는 데 있습니다.…”(김병관사장 충정로사옥 준공식사)

아침신문으로 변신

충정로 시대는 동아일보가 제2의 도약을 위해 몸부림친 시기였다. 조간신문으로의 전환과 전면 가로쓰기, 대학을 정보화기지로 만들기 위한 인터넷 유스캠프 운동과 국토를 청결하게 가꾸기 위한 그린스카우트 운동 등 진취적인 많은 사업들이 충정로 시절에 열매를 맺는다.
창간 73주년 기념일인 93년 4월1일, 동아일보는 30년이 넘는 긴 석간시대를 마감하고 ‘아침신문’으로 발행체제를 바꿨다. 한때 발행부수 1위 자리를 내주고 있던 동아일보가 조간화라는 사운을 건 결단을 내린 데에는 조간 대세론이 크게 작용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 정보의 효율적인 공급과 광고효과면에서 조간이 유리한데다 석간신문과는 달리 저녁시간대에 TV와 경쟁을 피할 수 있고 밤사이에 인쇄와 수송이 가능해 교통난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조간화를 앞둔 3월22일 주주총회는 김병관 사장을 대표이사 회장(발행인)으로, 권오기 부사장을 대표이사 사장(편집인)으로 선임했다.
권오기 신임 사장은 취임사에서 “자기에게 엄한 신문임을 스스로 다짐하고 독자의 참여를 환영하는 열린 신문을 지향하자”고 강조했다. ‘아침신문 동아일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32면 증면과 함께 지면제작과 배달체계를 일신한 결과 발행부수는 조간화 6개월 만에 200만 부를 넘어섰다. 광고주들의 호응도 크게 늘어 광고게재 의뢰도 30% 이상 증가했다.

 


Copyright 2000 동아닷컴. E-mail : newsro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