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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레와 함께 뛴 동아마라톤
1931년 3월20일 눈길을 끄는 기사 하나가 동아일보에 실렸다.
금년도 스포츠 씨슨의 벽두일 경성-영등포간 왕복 14마일반의 마라손 경주대회는 이윽고 명21일로
림박하얏다. 이 날 정오를 알리우는 싸이렌 소리의 그침과 함께 광화문통 본사 정문의 출발점으로부터
스타트를 비롯하야 태평통(太平通)으로 달려 남대문 밧그로하야 한강철교를 건너 로량진의 경인 1등가도우를
달리어 영등포 역전의 교차점에서 되돌아가든 그길로 한숨에 출발하든 본사 정문아페 귀착할 터인데
지금까지의 련습시간과 밋종래의 기록을 참작하면 이 구간 소요시간은 1시간20분 가량을 그중 빨른
기록으로 잡고 당일 오후 1시20분경부터 동 50분까지는 전부 귀착할 예정이다.
‘京永街道五十里
壯快할 明日의 競走’라는 제목과 함께 마라톤대회 개막을 알리는 예고기사였다. 한 해 전 열린
단축마라톤에 이어 고려육상경기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체육회가 공동후원한 이 제1회 마라손경주회가
바로 오늘날 ‘민족의 레이스’로 성장한 동아마라톤의 효시였다.
조선체육회 유억겸(兪億兼)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전 임원이 소매를 걷고 나서서 준비한 끝에 당시
서울 장안이 떠들썩할 만큼 성대한 레이스가 벌어졌다. 이 대회에는 그 무렵 마라톤왕으로 정평이
나 있던 이성근과 변용환 외에 김은배를 비롯한 양정고보의 6명 등 14명이 출전한 결과 예상을
깨고 김은배가 1시간22분5초로 첫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로부터 70년, 동아마라톤은 그 오랜 세월을 민족과 함께 달려왔다. 99년 3월21일 경주에서
열린 제70회 동아마라톤 마스터스 부문은 참가자가 1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동아마라톤의 역사는 바로 한국 마라톤의
역사다 한국마라톤이 오늘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것은 동아마라톤이라는 요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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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마라톤을 거들떠보지 않던 시절부터 동아일보는 소중하게 그 싹을 틔웠고 물과 거름을 주며 가꾸어왔다.
동아일보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동아마라톤은 일제시대에는 압제에 맞서 민족의 얼을 고양하는 구심점이
됐고 광복 후에는 신기록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마라톤은 누가 뭐래도 겨레의 스포츠다. 오직 앞만 보고 100리 길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은 화려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지만 끈기와 강인한 정신력이 없으면 결코 결승점에 들어설 수 없다. 은근과 끈기는 우리
민족의 힘이다. 동아일보가 처음 마라톤대회를 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아일보가 창설한 첫 스포츠대회는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1923년의 여자정구대회였다. 이어 26년
4개 구락부 야구연맹전, 29년부터 조선수영경기대회를 개최했고 그로부터 2년 뒤 드디어 마라톤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신기록의 산실
대회를 거듭하면서 동아마라톤은 성장일로를 달렸다.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은 2회째인 32년
대회에 등장한다. 신의주에서 원정 온 손기정은 이 대회에서는 국내 장거리계의 최강자였던 변용환에
뒤져 2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베를린 올림픽 신화의 서막을 열게 된다.
3회 대회는 1, 2회 때와는 달리 광화문 사옥 앞을 출발해 청량리를 지나 망우리를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손기정은 당시 양정고보에 재학중이었다. 35명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손기정은 유해붕과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1위로 골인했다.
1936년 동아일보는 환희와
고통을 함께 맛보아야 했다. 동아마라톤이 배출한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함께 월계관을
써 환희를 맛본 것도 잠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고통스러운 제4차 정간처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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