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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동아의 승리
1987년 9월20일 신동아 10월호를 찍어내는 기계음이 요란하던 서울 동아인쇄공업 윤전실.
밤 9시30분 7명의 건장한 청년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들은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
수사요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윤전실을 점거하더니 인쇄를 중단시켰다.
80년대 자유언론의 빛나는 승리로 기억되는 제2의 ‘신동아 사태’는 이렇게 시작됐다. 발단은
10월호에 실린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 기사였다.
한·일간에 이미 타결된 이 사건을 재론하는 것은 심각한 외교문제를 야기해 국익을 해칠 우려가
있고 전직 국가주요기관의 책임자가 재직시에 알게 된 비밀을 발설하는 것은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그 내용을 게재하는 것 역시 위법이라는 이유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당시 일본에서 반정부 운동을
하던 그가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됐다가 닷새 만에 극적으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사건이다.
출판국 기자 80여 명은 다음날 급히 기자총회를 열고 ‘신동아 제작탄압 즉각 중지하라.’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성명서는 ‘신동아 10월호의 이후락씨 증언기사 게재는 그동안 가려져온 진실을 밝히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지적하고 ‘신동아 제작을 공권력으로 저지한 행위는 또다시 언론자유를
유린하는 중대한 도전이며 당국이 내세우는 민주화의 실체가 무엇인가 의심케 한다.’고 공박했다.
정부측은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이 기사를 삭제하면 요원들을 철수시키겠다고 제의해왔다. 그러나 기자들은
단호했다. “실정법 저촉여부는 간행물 발행 이후의 문제이며 당국이 그 이전에 사전검열로 제작을
저지한 것은 명백한 위헌이다. 또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국익을 위하는 길이다.” 이 주장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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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은 불가능했다. 장행훈(張幸勳)
국장이 이끄는 출판국 직원들은 당일로 여의도 사옥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튿날은 편집국
기자들과 출판영업국 직원들이, 뒤이어 총무국과 공무국 직원들이 농성에 가담했다. 편집국 기자들은
‘신동아 제작 탄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사 내용의 국익손상 여부에
대한 판단은 언론사의 자율적 결정에 맡겨야 한다. …정부당국이 기사의 공익성과 실정법 저촉여부를
사전에 검열, 판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물리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인쇄를 중단케
하는 행위는 자유언론에 대한 명백한 탄압’이라고 이 성명은 규정했다. 신동아 사태가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알려지자 외국 기자들이 농성장으로 달려왔다. 그동안 언론에 대한 간섭과 탄압 사례들은 많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 AP통신 CBS방송 등이 잇따라 타전했고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이후락씨의 증언을 담은 신동아와 월간조선 발행이 안기부 요원들의 인쇄소 점거로 지연되고 있으며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은 농성에 돌입했다.’는 내용을 22일자 3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문의 및
격려전화도 쇄도했다. “구독료 10년치를 선불할 테니 끝까지 싸워달라.”고 하는가 하면 “격려금을
보내고 싶으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 “건강에 유의하라.”는 전화도 있었다. 서울의 한 주부는 “남편과
함께 농성에 동참하고 싶다.”고 했다. 공개질의서를 발송하다 24일부터는 박찬종 민주당 의원을 선두로
각계인사와 독자들이 격려차 농성장을 방문했다. 장기욱 민주당 의원은 격려금을 전달했고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회원들은 주스 세 통을 들고 왔다. 25일에는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고문이 농성장을 찾았다.
김총재는 문제의 기사를 쓴 이종각 기자를 직접 만나 격려했다. 김대중 고문은 즉석연설을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정식 제의하겠다. 언론자유 없이는 민주화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태가 커지자 당황한 쪽은 정부였다. 최창윤(崔昌潤) 문공부 차관은 “사전검열을 한 적이 없고 신동아의
인쇄를 중단시키지도 않았다.”고 발뺌했다가 손가락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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