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민주화의 횃불 > Ⅳ. 거짓을 말하느니 입을 닫겠다>2. 광주 민중항쟁과 무사설 page1
 

2. 광주 민중항쟁과 무사설

사설(社說)은 신문의 얼굴이다.
주로 그 날의 가장 중요한 이슈에 대해 신문사가 자신의 책임 아래 표명하는 의견이나 논평, 주장이 바로 사설이다. 때문에 사설 없는 신문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1980년 5월19일부터 23일까지 닷새 동안 동아일보 지면에는 사설이 없었다. 바로 광주민중항쟁으로 나라가 용광로처럼 들끓던 기간이다. 80년 봄에 접어들면서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급격히 확산했다. 계엄령 아래서 민주화 일정이 계속 지연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광주에서도 5월13일부터 9개 대학 학생들이 매일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17일 자정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휴교령이 내렸다. 18일 아침 교문 앞에 모여든 전남대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이어 오후 4시경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과 함께 공수특전단이 투입되면서 무자비한 살육극은 막이 오른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탄을 퍼붓고 흥분한 시민들도 경찰서와 예비군의 무기를 탈취해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19일 아침 동아일보 남시욱 논설위원은 ‘광주사태’와 관련한 사설을 썼다. 계엄령하였기 때문에 모든 기사는 검열을 받아야 했고 이 사설도 서울시청에 자리잡고 있던 검열반의 책상위에 올랐다. 붉은 사인펜을 든 검열관은 원고지 위에 마구 줄을 그어댔다.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사설 중 앞에서부터 절반 가량이 뭉텅 잘려 나갔다.
잘린 부분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광주에서 온 소식은 참으로 가슴아픈 것이다.… 그러나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 데모하는 시민은 우리 국민이지 적이 아니므로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 당시 검열은 어떤 부분을 삭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목까지 고치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지 않으면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 바람에 당초 편집의도와는 전혀 다른 강제적인 제목이나 기사가 신문에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쯤 되면 단순한 검열이라기보다는 기사조작이라고 해야 맞지만 검열거부 자체가 계엄법 위반이므로 언론사로서는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시욱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설이 형편없이 잘리고 보니 도저히 잘린 부분만 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을 전달하는 일반 기사와는 달리 차근차근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사설은 반토막이 나버리면 논리구성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대부분의 신문은 하루에 두 개의 사설을 실었는데 가장 중요한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사설을 빼고 다른 사설만 내보낼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동아일보는 아예 사설을 없애기로 한 겁니다. .
무사설(無社說)의 저항’은 이렇게 시작됐다. 남시욱은 이튿날도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사설을 썼다. 표현만 조금 달리했을 뿐 줄거리는 전날과 다름없었다.
검열관은 또 붉은 줄을 죽죽 그어댔고 동아일보는 그 날도 사설을 싣지 않았다.
이렇게 닷새가 지나갔다. 매일 아침 열리는 논설회의 분위기는 비장했다. 신군부의 서슬이 아무리 시퍼래도 결코 계엄당국의 입맛대로 사설을 쓸 수는 없다, 우리의 주장을 제대로 펼 수 없을 바에는 아예 사설을 싣지 말자는 것이 박권상(朴權相) 논설주간을 비롯한 논설진의 일관된 분위기였다. “이럴 바엔 사설을 빼자” 독자들의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왜 사설이 없느냐.” “계엄당국이 쓰지 못하게 하느냐.” “언제까지 사설을 안 쓰느냐.” 격려전화도 잇따랐다.
“마음대로 쓰지 못할 바에는 아예 안 쓰는 편이 낫다.” “역시 동아일보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 함께 울분을 토로하는 독자도 적지 않았다.
사설이 나가지 않는 동안 ‘동아희평’ 역시 지면에서 사라지고 ‘고바우 영감’도 거의 실리지 못했다. 검열이 대폭 강화된 13일부터 광주항쟁이 진압된 27일까지 일요일을 제외한 13일 동안 ‘동아희평’은 11일, ‘고바우 영감’은 8일이나 지면에서 사라졌다.
‘무사설의 저항’과 궤를 같이 한 셈이다. 계엄당국의 철저한 검열로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조차 신문지상에 오르지 못했던 광주항쟁은 21일 석간에 ‘광주사태 대책 강구’라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내용과 함께 비로소 지면에 단 한 줄 단신(短信)으로 나타난다.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 이것이 전부였다. 총부리와 대검을 앞세운 진압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행방불명되고 개처럼 두들겨 맞으며 끌려간 사건에 관한 보도치고는 너무도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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