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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지 않는 봄
‘서울의 봄’이 오고 있었다. 늦가을 밤공기를 찢은 ‘궁정동의 총소리’로 한순간에 모든 정치적
흐름이 반전했다. 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쓰러지면서
유신체제는 그 날 밤으로 허물어졌다. 유신독재가 빠져나간 자리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민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JP(김종필) YS(김영삼) DJ(김대중)의 3김(金)쪽으로
옮아갔다. JP는 박대통령 장례가 끝난 뒤 집권여당의 정치기반을 그대로 흡수했다. 누구도 그가
박대통령이 떠난 자리를 이어받아 당의 총재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공화당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민당
총재인 YS는 10·26만으로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YH여공 농성사건, 신민당 의원 농성,
국회의원직 제명에서 부마(釜馬)사태로 이어진 2개월간의 ‘10·26전야’는 그와 박정희의 정면대결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재야의 DJ는 10·26 당시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어 있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7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있는 상태였다. 3김은 이처럼 유신과
불가분의 연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유신체제가 무너지면서 3김의 경쟁관계가 ‘서울의 봄’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채 오지 않은 ‘서울의
봄’에 결정적으로 일격을 가하는 사건이 터진다. 바로 12·12사태다.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한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한 사건이다. 이들은
이후 5·17 계엄확대와 광주민중항쟁 진압 등을 거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정치 표면에
나서게 된다. 박대통령이 피살된 때로부터 한 달 반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80년 초 JP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묻는 기자들에게 특유의 비유법을 써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는 지금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봄이 꽃이 피어날 봄인지, 다시 겨울 속으로 돌아가버릴 봄인지
알 수가 없다. 이른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의 정국이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안개정국이라고 할까.”
불행하게도 이 말은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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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이 말은 들. 어맞았다민주화 움직임이
청신호를 켠 듯하던 연초의 상황이 어두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 캠퍼스는 연초부터
유신과 함께 폐지했던 총학생회 부활을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3월28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전후해서 각 대학에서 잇따라 총학생회가 출범했다. 총학생회의 일차적인 목표는 학도호국단 폐지,
정보원의 학원사찰 및 학내 출입금지, 어용교수 퇴진과 지도교수제 폐지, 학생활동과 학내 언론자율화
보장 등으로 대표되는 학원자율화였다. 이 해 4월18일 문교부가 집계한 학원민주화 투쟁 상황에
따르면 당시 학원민주화를 거부하는 총학장 퇴진요구가 21개 대학, 어용교수 퇴진요구가 24개
대학, 재단비리 척결 요구가 12개 대학, 학교시설확장 요구가 11개 대학, 학생회 인정 및
학내 언론자유 요구가 20개 대학이었다.
동아일보는 4·19혁명 20주년을 맞아 4월19일자
‘횡설수설’에 이렇게 썼다. 언제나 어디서나 압박은 혁명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씨앗이 뿌려졌다고
해서 반드시 혁명이 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권력만능으로 국민을 지배하는 자는 틀림없이 폭군이고
독재자지만 이에 복종만 하는 ‘백성’의 시대가 있다. 폭군의 통치를 감수하는 경우 ‘백성’은
곧 ‘노예’다. 폭군이 있는 곳에 노예가 있고, 노예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 폭군이 설 땅이 없다.
…4·19혁명 스무 돌. 폭군의 교만과 불의를 거부하고 자칫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는 무서운
강압을 물리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20년 동안 자유의 나무가 얼마나 자랐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 없다.
분명하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큰 진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차례의 혼란과 무질서 시대 끝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이 다시 한 번 압박과 곤욕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며 비겁하게 불의의
편에 섰던 자들이 계속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용감하게 자유의 편에 선 사람들이 계속 그늘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희극적인
현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한국 토양에 맞지 않는다고 매도하던 정치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겉으로
민주주의 운운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의 앞잡이였던 정치인과 지식인들, 그들이 하루 아침에 열렬한
민주주의자가 되었다는 것, 때로는 민주투사인 양 행세까지 한다는 현실이다. 80년 4월19일
아침부터 모진 비바람이 역사의 현장, 세종로 거리를 휘몰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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