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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표정’은 국내 방송사상 처음 특파원들의
현지보고 녹음으로 구성됐다. 개국 초부터 동아방송의 보도역량을 끌어모아 스테이션 이미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냈던 대표적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DBS리포트’는 76년 4월부터 취재지역을
세계로 확대해 방송사상 초유의 정규 해외기획물로 자리잡았다.
‘중동 르포’를 시작으로 80년 5월 ‘오늘을 사는 유럽인’에 이르기까지 매일 20분씩 방 송된
‘DBS리포트’는 50여 명이 지구촌 곳곳을 샅샅이 훑으며 세계의 숨결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 가운데 ‘아메리카 이민 80년’은 제5회 한국방송대상과 방송윤리위원회상을 동시에 받아 프로그램의
성가를 높였다.
4. 눈물로 띄운 마지막 전파
송지헌(宋芝憲)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울음을 참고 있음이 분명했다. 민족의 방송으로 자임한 지 17년 7개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국당하는 울분이 목소리에 가득했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방송해드린 DBS
동아방송을 들으셨습니다. 1963년 4월25일 새벽 5시 주파수 1230㎑ 출력 10㎾로 첫
전파를 발사한 이래 18년 동안 청 취자 여러분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저희 동아방송이 이제 고별의
장막을 내리게 되었습니 다. 그동안 동아방송을 애청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께 뜨거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 분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HLKJ.”
1980년 11월30일 밤 12시. 동아방송의 마지막 멘트였다. 왜 방송을 중단해야 하는지 아무런
설명도 달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었다. 닷새
전 기독교방송의 고별뉴스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울음을 터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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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잔뜩 긴장한 신군부가 ‘고별방송에 관한
지침’을 엄하게 통보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전 해 12·12사태로 권력의 전면에 나선 이른바
‘신군부’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5공출범과 함께 언론장악의 마지막 수순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이후 모든 고별 멘트, 고별 프로의 대본 등은 미리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진행자와
출연자는 검열받은 원고나 대본 외의 다른 어떤 애드립(즉흥대사)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통곡하는 것이 전부였다.
11월30일, 그 날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이어진 DBS의 고별방송은 민주주의가 죽었음을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 같았다. 오전 8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된 마지막 ‘뉴스 쇼’에서 진행자
최종철(崔鍾哲) 정경부장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동아방송 보도의 공과 과는 후세의 평가에 맡기려 합니다. 그러나 후세에 동아방송 기자들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격동의 한 시대를 정의의 편에 서서 열심히, 성실하게 뛰었다고 말하려
합니다. 동아방송의 18년사는 분명히 한국언론사에 비록 짧지만 굵게 기록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순간 동아방송 기자들은, 손때 묻은 취재수첩을 여백을 남긴 채 일단 접으면서 애청자 여러분이
저희들에게 주신 격려와 성원 그리고 질책까지도 귀중한 보람으로 마음속 깊이 간직하려 합니다.
동아방송의 폐국은 이른바 ‘80년 언론 대학살’로
불리는 언론인 대량 해직과 언론기관 통폐합의 결과다. 개혁주도세력을 자처하는 신군부 새 집권층에
의해 자행된 언론인 해직은 그 해 7월부터 막이 올랐다.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에 앞장선 기자들을
비롯, 반체제 언론인들을 숙청한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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