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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에서 내각수반을 지낸 송요찬(宋堯讚)도
당초 혁명공약대로 정권을 민간에 넘기고 군인들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때맞춰 4대 의혹사건이 불거져 김종필까지 궁지로 몰렸다. 군사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63년 2월18일 돌연 민 정불참을 선언했다. 이어 2월27일 그는 민간
정치인들과 군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30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민정에 불참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2·27선서가 해프 닝으로 끝나지만 않았어도 한국의 민주화는 좀 더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군정연장을 주장하는 정치 군인들의 요구를 다시 받아들인 박정희는 불과 보름 남짓 만인
3월16일 “과도적 군정연장이 필요하다.”고 말을 바꾸더니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했다.
‘군정연장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기에 앞서 민의 를 왜곡할 우려가 있는 정치활동을
정지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권리를 필요한 범위 에서 제한한다.’고 둘러댔지만 의도는 뻔했다.
반대세력의 손발을 묶어 놓고 무혈입성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여기에 동아일보는 ‘사설없는 신문’을 발행하며 대항했다. 사설은 신문의 주장이니만큼 사설없는
신문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설을 싣지 않는 것은 “차라리 입을 닫겠다.” 는 무언의 항의다.
침묵은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을 지닌다. 오로지 찬양과 미화만 을 요구하는 군사정부의
언론탄압에 동아일보는 아예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이 무언의 항의는 3월18일부터 29일까지 무려 12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동아일보의 침묵항의에
자극받은 한국신문발행인협회도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임시조치 법 3조를 철폐하라.’는 내용의
시국수습 결의문을 발표했다. 민간 정치인들도 가두시위로 군정연장안에 항의했다. 군사정부의 3·16선언은
애초부터 승산없는 도박이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까지 강하게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자 군사정부는
안팎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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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4월8일 군정연장 가부에 관한 국민투표안이
9월 말까지 보류되고 임시조치법이 폐기돼 언론·집회·시위에 대한 제한은 일단 풀렸다.
2. 자유언론의 몸부림
1963년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따로 치르려는 군정당국의 방침에 동아일보는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두 선거를 별도로 치르려는 데에는 군정당국이 권력을 총동원해서 먼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다음
안정세력 확보라는 미명 아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강자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이
분명했다. 동아일보는 5월21일자 사설을 통해 ‘분리선거를 내세우는 궁극적인 동기는 결국 정략적이며
국민의 편의와 국고의 절약을 무시하거나 경시한 공론 아닌가.’라고 날카롭게 공박했다.
아픈 곳을 찔린 군정당국에는 동아일보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당에 8월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전 군정내각수반 송요찬의 ‘박정희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은 군정당국 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제3면 전체를 할애한 장문의 이 편지에서 송요찬은 박정희에게 대 통령 선거 불출마를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러니 이를 독점게재한 동아일보에 대한 군정당국 의 감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군정당국은 곧 6·25전쟁 당시 장교를 사살했다는 혐의 등으로 송요찬을 구속했지만 막 최 두선(崔斗善)에서
이희승(李熙昇) 사장 체제로 바뀐 동아일보를 향해서는 아직 발톱을 감추 고 있었다. 국어학자이자
시인으로 일제하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까지 치른 이 희승 사장은 4·19혁명을 지지하는
60년 4월26일의 교수단 시위 때 선두에 섰던 대쪽 같은 인물이다.
박정희 의장이 동아일보에 공개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것은 10월15일의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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