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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 폭거 속에서
전시에 피란지의 신문 여건은 말이 아니었다. 판매망이
제대로 없어 가두판매에 의존했다. 광복동 네거리, 영도다리, 서면 등지 번화가에 책상을 내다놓고
종을 울리면서 신문을 팔았다. 앞뒤 한 장짜리여서 1면은 외신, 2면은 국내 보도로 채웠는데
그나마 전쟁 관련 기사가 태반이었다. 고정난 ‘휴지통’도 전시 분위기를 반영해 ‘십자군(十字軍)’으로
개칭했다. 속간 첫호에 실린 ‘속간사(續刊辭)’는 동아일보 사원은 물론 절망과 공포, 그리고
희망 속에 동요하는 일반 국민의 착잡한 심경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정부 환도 이후 작년 10월3일부터 금년 1월3일까지 만 3개월간 폐허 위에서 분투노력한 보람도
없이… 기업적인 계산을 초월하여 연약한 붓 한자루로 시작하는 일이라 앞길에 허다한 가시밭이 있으리라.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에게 가시밭길이 문제겠는가. …이 붓대가 부러지는 날까지 우리 다같이
한데 뭉쳐서 침략자를 물리치고 조국의 민주통일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미력을 다할 것…
지금 전황(戰況)은 반드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무장관 애치슨 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실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유엔군의 후퇴가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신경과민에 걸릴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후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유엔이 중공군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명령이 내리기 전에는 유엔군이 지닌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럴 바에야 후일을 기약하며 질서정연한 후퇴를 감행하는
것은 오히려 현명한 조치인 것이다.
우리는 유엔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기 직전까지는 반드시 중공 응징에 대한 추상 같은 결의가
채택될 것을 굳게 믿는 바이며, 이 결의가 채택되면 유엔군은 사력을 다해 낙동강 교두보를 유지할
것이며 중공군 격멸에 대한 비책이 전개되고야 말 것이다.
겨레여! 우리는 유엔과 미국과 유엔군을 신뢰하자.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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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다같이 굳게 뭉쳐서 추호의 동요도
없이 각자의 책임 완수에 몰두하고 분발하여 이 성전(聖戰) 완수에 일로 매진하기를 촉구하고자
한다.
51년 1월부터 전세는 다시 역전돼 북진한 유엔군과 국군은 3월1일 마침내 서울을 재탈환하고
4월 초 38선을 다시 돌파했다. 그리고 38선 북방에서 일진일퇴하는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전시하의 야당신문
피란지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 대형 사건을 둘러싼 정부의 비정(秕政)을 파헤치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검찰은 동아일보가 51년 9월25일자에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부사령관 윤익헌(尹益憲)을
구하려고 미 고위층에 거금이 들어갔다는 경찰 조서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편집인 고재욱과 기자
최흥조를 불구속 기소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정면으로 맞섰다. 이를 계기로 대다수 언론사들이 일제히 언론관련 법안의
비민주성과 위헌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중앙청 기자단, 국회 기자단과 법조 기자단이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앞으로 언론 관련 악법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이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전시하 언론에서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필화(筆禍)사건이다.
9월24일 오전. 동아일보 취재부장 최흥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서 나와 곧바로 경남도청으로
취재하러 나갔다. 경남도청은 임시 중앙청, 다시 말해 전란중에 임시 정부청사로 쓰고 있었다.
그는 매일 만나다시피하며 교분을 쌓아온 한 고위관리로부터 중대한 사실을 귀띔받았다. 국민방위군사건과
관련해 사형을 언도받은 윤익헌의 처가 건네준 거액의 구명운동비를 미군 대령에게 주었다는 김대운의
경찰진술 내용을 내무부차관이 9월8일 국회 본회의에서 보고했는데, 이 사실이 공개된 것에 대해
주한미대사관이 외교 관례를 들어 항의했고 이에 따라 내무부장관이나 차관 중 하나가 책임을 지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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