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재산 뺏긴 치매 노인 7만명… 판결문 속 피해자 49명뿐

재산 뺏긴 치매 노인 7만명… 판결문 속 피해자 49명뿐

Posted December. 16, 2025 08:30   

Updated December. 16, 2025 08:30


가을이 깊어 가던 2021년 10월 충남 논산시의 한 거리. 낡은 옷차림의 치매 노인 정순호(가명·71) 씨가 하염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노인보호전문기관 조사관이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조차 가물가물해했다. 하나의 문장만 또렷하게 반복했다. “돈을…. 돈을 되찾아야 돼.”

조사관이 확인한 순호의 통장은 참혹했다. 2020년 7월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2억 원 넘는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치매에 걸린 후 통장 관리를 도맡았던 옛 직장 후배(69)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뭉칫돈이 후배의 딸과 지인의 계좌로 송금된 내역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관은 끝내 후배를 경찰에 넘기지 못했다. 후배는 항상 순호가 직접 돈을 보내게 했고, 치매 환자인 순호의 오락가락하는 진술로는 횡령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관 측에서 후견인이 되어 돈을 되찾으려 했지만, 후배의 딸과 지인은 그새 파산 선고 뒤에 숨은 상태였다. 결국 순호는 돈을 다 돌려받지 못한 채 지난달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통과 죽음은 노인보호전문기관의 한 장짜리 ‘학대 판정서’ 속에만 남았다.

치매 노인의 자산을 노리는 범죄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실태 조사는 단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얼마나 많은 재산을 잃는지,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파악조차 안 된다. 지난 5년간 금융 범죄에 희생된 치매 환자는 6만7443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유죄 판결문에 나타난 피해자는 고작 49명이었다. 피해자가 1000명이라면, 법의 심판을 받는 가해자는 1명도 채 되지 않는 셈이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보건복지부 산하 노인보호전문기관에 잠들어 있던 5년 치 ‘치매 노인 경제적 학대’ 판정서 379건을 분석했다. 공식 통계에 없는 ‘암수(暗數) 치매머니 사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 중 수사기관에서 인지한 사건은 34건(8.9%)뿐.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그 속에는 자녀에게, 믿었던 요양보호사에게, 혹은 지인에게 평생 모은 돈을 빼앗기고도 “가족이라서” “치매라서” 침묵해야 했던 노인들의 비명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