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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벽 쌓을때 ‘사람 제물’ 바쳤다

Posted May. 17, 2017 07:24,   

Updated May. 17, 201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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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세기 신라인들이 성벽을 쌓으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이 경주 월성(月城)에서 최초로 확인됐다. 건축물을 세우는 과정에 인신공양을 시도한 고고학 증거가 국내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4, 5세기 마립간 시대 신라인들이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 순장(殉葬)을 시행한 동시에 왕궁 성벽에도 사람을 제물로 묻은 셈이다.

 16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월성 서쪽 성벽의 서문 터 근처 발굴현장에서 성인 인골 2구가 발견됐다. 이들은 1.5m 높이로 쌓아올린 성벽의 기초부 상단에 묻혀 있었다. 키 165.9cm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골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성별 미상의 유골(키 159.3cm)은 옆으로 살짝 기울어 상대방을 바라보는 자세다.

 발굴단이 이들을 인신공양으로 보는 근거는 팔다리가 곧게 펴진 데다 성벽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인골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발치 끝에서 제기(祭器)로 보이는 신라시대 토기 4점이 함께 발견됐다. 중국 상나라 은허 유적에서 확인된 인신공양 시신들이 머리가 잘린 것과 달리 월성 유골에는 외상이 거의 없었다. 박윤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독약 등으로 목숨을 끊은 뒤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골 밑에는 돗자리처럼 풀로 직조(織造)한 흔적이 나왔고, 얼굴과 몸에서 나무껍질이 여러 점 발견됐다. 특히 상대방을 바라보는 인골의 한쪽 어깨가 갈비뼈 위로 살짝 들려 있어 붕대로 꽁꽁 싸맨 것처럼 보인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고인골 전공)는 “땅바닥에 돗자리를 깐 뒤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며 “얇은 나무껍질로 수의처럼 온몸을 칭칭 감았다”고 설명했다. 옆으로 살짝 기운 유골의 발목에서 가죽신으로 보이는 단백질 성분도 검출됐다.

 무엇보다 성벽에서 인골들이 발견된 위치가 눈길을 끈다. 월성 인골은 서문 터 근처에서 나왔다. 예로부터 성문은 적군이나 질병 같은 재앙이 드나드는 통로로 인식돼 제의가 빈번하게 행해졌다. 백제시대 주술용 남근(男根) 목간도 부여 나성(羅城)의 동문 근처에서 출토됐다. 월성 인골의 경우 높이 10.5m 성벽의 기초부에 묻혀 있어 건축물 하단에 묻는 진단구(鎭壇具·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공양물)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경내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 발견된 10세 안팎의 어린아이 유골도 일종의 인신공양 사례로 추정된다. 당시 우물에서는 각종 동물 뼈와 토기들도 나왔다. 학계는 경주박물관의 경우 건물을 세우는 과정과 무관하게 우물을 폐기하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고 있다. 월성 인골과 비교하면 제의 목적이나 성격이 다른 셈이다.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간지(干支·연도)가 적힌 목간이 월성에서 처음 출토됐다. 해당 목간에서는 ‘병오년(丙午年)’ 묵서가 확인됐는데, 이는 법흥왕 13년(526년) 혹은 진평왕 8년(586년)에 해당한다. 만약 법흥왕 13년으로 확인되면 성산산성 출토 목간보다 앞서는 삼국시대 최고(最古) 목간으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함께 터번을 둘러 이란계 소그드인으로 보이는 6세기대 토우(土偶·흙으로 빚은 인형)도 발견됐다. 괘릉 무인상과 경주 용강동 고분 등에서 서역인을 닮은 조각상이 나왔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이미 삼국 통일 전 신라인들이 서역과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상운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