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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한인 사회 재건 꿈꿨던 헤로니모, 다큐영화로 부활

쿠바 한인 사회 재건 꿈꿨던 헤로니모, 다큐영화로 부활

Posted March. 23, 2019 07:29,   

Updated March. 23, 20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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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은 마음에 시(詩)를 불어넣는 심장박동이다.”

―헤로니모 임 김의 시 ‘조국(homeland)’ 중(번역)

 지구 반대편 카리브해 섬나라 쿠바에서 가수 노사연의 유행가 ‘만남’을 함께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일제의 압제에 조국을 떠나 쿠바까지 흘러들어 온 한인(韓人) 후손이다. 1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지금도 함께 모여 한국어를 배우고, 애국가를 부른다. 1921년 쿠바 땅에 첫발을 디딘 이후 여전히 한인 사회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한 숨은 영웅의 노력이 있었다. 바로 고(故) 헤로니모 임 김(Jeronimo Lim Kim·임은조)이다.

○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위해 소매 걷고 뛰어

 1926년 쿠바에서 태어난 헤로니모의 삶은 곧 쿠바 한인의 역사다. 헤로니모의 아버지 임천택은 만 2세 때 1905년 홀어머니 품에 안겨 멕시코 에네켄(용설란) 농장으로 떠났다. 이후 쿠바로 이주한 그는 현지에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다. 사후인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한인 최초로 아바나대 법대에 입학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던 헤로니모는 그곳에서 대학 동기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과 함께 혁명 전면에 선 그는 이후 식량산업부 차관까지 올랐다. 1967년 북한에도 다녀왔다.

 헤로니모가 쿠바 한인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한 건 1995년 정부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초청돼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으면서부터다. 쿠바 내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한 그는 철학과 교수 출신 여동생 마르타 임 김(임은희)을 도와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책을 낸다. 선교사들을 지원해 한국어학교도 세웠다. 쿠바 한인들이 ‘만남’이나 ‘고향의 봄’ 등의 노래를 알게 된 건 이때부터다.

 숙원은 쿠바 내 한인회 설립이었다. 공식 한인회 설립을 위해선 한인의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정부의 요청에 헤로니모는 자신의 차를 몰고 쿠바 방방곡곡을 돌며 한인들을 만났다. 현지 신문에 광고도 냈다. 쿠바 이주 80주년인 2001년에는 마나티, 엘볼로 지역에 한인이주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두 기념비는 모두 조국이 있는 서쪽을 향해 세웠다.

 헤로니모는 2006년 80세의 나이로 쿠바에서 눈을 감았다. 쿠바 이주 98주년인 현재, 그의 숙원이었던 한인회 설립은 쿠바 정부의 불허로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 국내 개봉 타진하는 ‘헤로니모’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의 이야기를 곧 국내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재미동포 전후석 감독(35)의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가 올해 국내 개봉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 중이다. 코트라 뉴욕지부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전 감독이 영화 제작에 뛰어든 건 2015년 12월 쿠바 배낭여행이 계기다. 현지 가이드로 헤로니모의 딸 페트리시아 임을 만난 것. 헤로니모의 아내, 형제 등을 만난 전 감독은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비용을 모은 그는 쿠바에만 네 차례 가는 등 4개국 17개 도시를 돌며 촬영했다. 쿠바 한인부터 선교사, 역사학자 등 70여 명을 인터뷰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법륜 스님 등도 후원의 손길을 건넸다.

 최근 국내 배급사들과의 미팅을 위해 입국한 전 감독은 “디아스포라(조국 밖에 퍼져 사는 이들)를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800만 명의 재외동포가 한반도 밖에 흩어져 살고 있다. 통일을 말하는 시대에 재외동포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한국인의 정의를 모두가 고민해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홍구 wind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