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당선작
2018
2017
2016
2015
2014
2013
2012
2011
2010
2009
2008
2007
2006
2005
2004
2003
2002
2001
2000
1999
1998






먹감나무 문갑               - 최길하


물 한 모금 자아올려 홍시 등불이 되기까지
까막까치가 그 등불아래 둥지를 틀기까지
그 불빛 엄동 설한에 별이 되어 여물기까지

몇 해째 눈을 못 뜨던 뜰 앞 먹감나무를
아버님이 베시더니 문갑을 짜셨다.
일월도(日月圖) 산수화 화첩을 종이 뜨듯 떠 내셨다.

돌에도 길이 있듯 나무도 잘 열어야
그 속에 산 하나를 온전히 찾을 수 있다.
집 한 채 환히 밝히던 홍시 같은 일월(日月)도.

잘 익은 속을 떠서 문갑 하나 지어 두면
대대로 자손에게 법당 한 칸쯤 된다시며
빛나는 경첩을 골라 풍경 달듯 다셨다.

등불 같은 아버님도 한세월을 건너가면
저렇게 속이 타서 일월도(日月圖)로 속이 타서
머리맡 열두 폭 산수, 문갑으로 놓이 실까.





* [당선자 자선]


백자 연적


절간도 다 타버린 외로 남은 塔 한 채,
밤새 아무도 몰래 눈이 내려 덮이고
동자승 샘물 길러 가 길을 잃어 버렸다.



도라지꽃

뿌리 쓴 꽃일수록 빛은 더욱 고운 법,
양귀비 모란꽃 민들레 도라지꽃
우리네 삶도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필까.

연보라와 백설이 살을 섞는 밭 너울에
사리하듯 알몸으로 바람 속에 다 벗고
우리 저 눈맞춤 끝에 걸리는 무지개 되자.

그리하여 그 빛으로만 물드는 세상을
쓴 것이 약이 되어 이 세상을 건지는
가슴에 한 마지기 뜰을 가꾸며 살아가자.



제실(祭室) 은행나무

중시조 할아버지 제실 뒤 은행나문
옻 칠 같은 툇마루에 제 모습을 비춰서
그 영매(影媒) 정받이 하여 많은 열맬 맺는다.

우리네 사는 일도 법화경에 비춰보면
한 방울 이슬 속에 이 세상이 다 들어서
꽃 피고 꽃 지는 길에 무지개로 걸리는 것.




길이 길을 떠나가는 억새 숲 바람꽃
돌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강 아우라지
그렇게, 길이 길을 버리는 굽이가 때로 있다.

산길을 가다가 그만 달을 놓쳐버려
그 때 그 막막함이 오늘 다시 떠오름은
아버님 그 환한 등불이 별이 된 까닭일까.

만나고 헤어짐도 어쩌면 저 길 같은 것,
사라졌다 나타나고 품속으로 기울어서
북극성 나침반 같은 점 하나만 찍어 준다.

산 하나가 부서져 모래바람이 되기까지
법화경 글 사이를 길이라 따라가면
이제는 스스로 가라 돋보기도 소용없다.


 

 

Copyright 2002 donga.com. E-mail.sinchoon@donga.com
Privacy poli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