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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대의 인식

Posted November. 02, 2015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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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가의 한쪽엔 누렇게 변색된 젊은 시절의 책들이 꽂혀 있다.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 중엔 30여 년 전 이념서적으로 불려 판매금지된 것들도 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 전환시대의 논리 등 입문서부터 현실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을 담은 책까지. 그땐 운동권이 아니어도 많은 대학생들이 그런 책을 읽고 토론했다.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는 1974년 6월 1판이 나왔다. 해전사는 1979년 10월, 1950년대의 인식은 1981년 3월에 각각 초판이 나왔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절 이런 책들이 젊은이들의 눈길을 끈 것은 국정 교과서에서 접하지 못한 현대사와 현실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이었다면 그런 책에 가벼운 지갑을 털진 않았을 것이다. 학교 앞 다방 커피가 200원이던 때 해전사는 4000원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뒤쪽 표지엔 여기에 우리는 혼탁한 정치의 기류를 고발하는 양식과 지성의 용기를 본다는 당시 노재봉 서울대 문리대 교수의 평이 실렸다. 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 학자 때 좌경서적을 칭찬했을까. 해전사 필진인 김학준, 1950년대의 인식 필진인 한승주 김대환 같은 학자들도 이념적으로 치우쳤다면 정부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책들이 모두 진실만 담은 것도, 뛰어나게 훌륭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정부의 통제가 특별한 책으로 만들었다. 그걸 읽었다고 다 의식화된 것도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 교과서 좌편향 문제 지적엔 상당 부분 공감하지만 국정 교과서 처방은 수긍하기 어렵다. 획일적 사관으로 배우면 결국 다른 데서 역사를 보는 시각의 보정이나 새로운 개안()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유신 교육을 잘 받았건만 진보성향의 책을 보고 혼돈을 느꼈던 세대의 경험이 그렇다. 박 대통령이 개인적 소신으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이 시대에 대해서도 훗날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는가.

한 기 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