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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후계 신당

Posted July. 13, 2015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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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으나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 1995년 7월 13일 김대중(DJ)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YS) 후보에게 130여만 표 차로 진 다음 날 정계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7개월 만이었다. 떠날 때 나는 또다시 국민들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다. 이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다고 했던 터라 컴백의 변()이 마땅치 않았다.

정치권은 요동쳤다. YS의 청와대에선 정직성은 정치인의 생명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이기택 민주당 총재는 우리 정치의 불행을 잉태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실질적 오너가 돌아오자 동교동계 의원들은 고용 사장인 이 총재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 총재가 거부하자 DJ는 곧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5대 대선 승리의 발판이 된 DJ 당이다.

DJ의 복귀는 그에 대한 정치적 수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YS의 문민정부는 초반에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등 과감한 조치로 박수를 받았으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참사가 터지고 차츰 개혁이 시들어 가면서 힘이 빠졌다. 1995년 627지방선거 때 전국 순회 연설을 하며 유권자의 지지가 여전함을 확인한 DJ는 지방선거 압승의 기세를 몰아 3전 4기로 프랑스 대통령이 된 프랑수아 미테랑을 떠올렸다. DJ의 정계 복귀와 공과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스스로 여당을 영남당이라고 한 바 있지만, 새정치민주연합도 호남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J에 뿌리를 둔 새정치연합에서 요즘 신당론이 불거진다. 최대 지지 기반인 호남에서 문재인을 DJ의 후계로 받아들이지 않는 정서와 무관치 않다. 정동영 씨가 대선후보로 나와 패배했고 최근 천정배 의원이 움직이고 있지만 DJ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기는 쉽지 않다. 호남 유권자들도 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을 키우는 데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 싶다.

한 기 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