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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의자놀이의 거짓말

Posted September. 14, 2012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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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공지영의 최근작 의자놀이는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386세대의 후일담을 소설로 형상화해 이름을 날린 이 작가는 2004년 사형수들을 인터뷰를 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쓰고, 2009년 한 청각장애학교의 성폭행 사건을 추적해 도가니를 쓴 이후 첫 르포르타주로 쌍용자동차 해직 노동자들의 사연을 다룬 의자놀이를 썼다. 우리들의가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이라면 도가니는 실화를 바탕으로 쓴 팩션(faction)이고, 의자놀이는 실화 자체를 지향하는 르포르타주다.

르포르타주의 생명은 현장이다. 르포르타주를 쓰기 위해서는 작가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지영은 쌍용차 현장에 있어본 적이 없다. 쌍용차 사태의 가장 치열한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 2009년 77일간의 파업 때도 그렇다. 공지영은 파업자들의 시각으로 파업을 그린다. 거기에는 77일간의 장기 조업중단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망해가는 회사를 살리고자 맨몸으로 나섰다가 다친 회사 안의 노동자들의 시각은 없다. 오로지 회사 안의 노동자들을 향해 볼트와 너트를 총알삼아 유사총기로 발사한 회사 밖의 노동자들의 시각만 있다. 그건 르포르타주가 추구하는 진실이 아니다.

책 표지에는 77일간의 뜨거운 파업의 순간부터 22번째 죽음까지, 작가적 양심으로 써내려간 공지영이 쓴이라는 선전문구가 있다. 쌍용차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보지 못한 공지영은 죽은 22명의 사연을 파헤치는 르포르타주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22명 중에 정확히 무급휴직자나 정리해고자는 2명뿐이고 가족까지 포함해도 3명이다. 나머지 사망자의 사연은 제대로 다루는 순간 22명이란 숫자에는 허수가 너무 많이 끼어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현장이 없을 때 거짓이 끼어들기 쉽다. 사실 르포르타주는 거짓이 끼어들 여지를 줄이기 위해 등장한 형식이다. 직접 가서 본 현장에 대한 기억은 어느 한편의 일방적인 주장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준다. 불행히도 공지영에게는 현장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한 편의 말만 전달하고 다른 편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의자놀이는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정치적 팸플릿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송 평 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