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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헌의 트로트 고고

Posted September. 12, 2012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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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이 되던 무렵인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최헌의 오동잎이 히트를 쳤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라디오로만 들을 수 있었고 TV에서는 최헌만 봤다. 내 기억속에 조용필을 처음 본 것은 1979년 이후다. 조용필이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TV에 나올 수 없었던 4년간은 최헌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1979년 조용필이 창밖의 여자를 들고 나와 1980년대를 휩쓸기 전까지 남자가수 중에는 그가 최고였다.

TV만 틀면 나오던 최헌의 노래가 지겨워던 1977년 어느날 하교길 버스에서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끝까지 다 듣느라 집 앞에 내리지 못했다. 사실 아니 벌써는 새로운 게 아니라 새롭게 들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이미 1975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같은 곡이 히트를 쳤지만 금새 금지곡이 된 그 곡을 듣지 못했다. 최헌 류의 곡을 트로트 고고라고 부른다. 음악평론가 신현준은 한국팝의 고고학 1970이란 책에서 1970년대 중반 신중현과 송창식을 좋아하고 1970년대 후반 산울림과 활주로를 좋아한 사람들에게 이런 곡들은 혐오의 대상 이상이 아닐 것이다고 쓰고 있다.

최헌은 사실 그룹사운드 보컬 출신이다. 키보이스와 함께 1970년대 초의 대표적 그룹인 히식스에서 조용필이 이 땅의 넘버원 기타리스트로 꼽은 김홍탁과 함께 활동했다. 음악평론가 강헌에 따르면 히식스는 보컬을 보강하기 위해 보컬과 세컨드 기타를 함께 할 수 있는 멤버를 오디션하게 된다. 리더인 김홍탁은 5명을 후보에 올려놓았다가 최종적으로 2명을 선발했는데 한명이 최헌이고 또 한명이 조용필이었다. 조용필은 비음이어서 허스키 보이스인 최헌이 뽑혔다.

유신은 가요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2년 가요 정화()운동에서 트로트가 왜색으로 몰리면서 TV에서 밀려났다. 그 빈자리를 송창식 등 세시봉 가수들의 포크송이 차지했다. 그룹사운드들은 장발 미니스커트 등 퇴폐풍조 단속에도 불구하고 호텔 고고클럽에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1975년 대마초 단속으로 흩어졌다. 최헌은 살아남아 솔로로 전향해 성공을 거뒀다. 그가 별세한 지금 천부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청중을 홀리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