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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감독들의 올림픽 메달

Posted August. 09, 2016 07:24   

Updated August. 09, 2016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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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대한민국에 첫 금메달을 안겼을 때 온 나라가 흥분의 물결에 휩싸였다. 한 시인은 ‘젊은 운동선수에 지나지 않았던 양정모가 태극기를 몬트리올 하늘 높이 휘날린 순간 한국의 아들, 한국인의 벗, 모든 한국인의 가장 가까운 혈연이 됐다’고 썼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경제가 도약하던 시기에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스포츠 무대에서도 알린 축포였다. 12년 뒤 한국은 올림픽 개최국이 됐다.

 ▷어려웠던 시절에 한국이 좋은 성적을 낸 것은 헝그리 스포츠라고 불리던 격투기 종목이 많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이 참가했던 6개 종목은 복싱, 레슬링, 유도, 사격, 남녀 배구였다. 기술이나 장비 이상으로 투지가 경기력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종목이다.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13분의 1 정도인 베트남은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10개 종목의 23명을 내보냈다. 한국은 24개 종목에서 204명이 뛴다.

 ▷남자사격 10m 공기권총에서 베트남에 사상 첫 금메달을 선사한 호앙쑤언빈은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돼 군에 입대했다. AK소총을 쏘다 숨은 재능이 드러나 국가대표로 발탁된 ‘늦깎이’였다. 연습장은 에어컨이 제대로 안 들어와 사우나처럼 푹푹 쪘고 외국 선수들이 하루 300발을 쏘며 연습할 때 50발 정도를 지급받는 데 그쳤다. 남는 시간은 빈총으로 자세훈련을 했다. 박충건 감독은 열악한 여건 때문에 호앙쑤언빈 선수를 데리고 한국으로 전지훈련을 왔다. 

 ▷호앙쑤언빈에 이어 은메달을 딴 펠리피 아우메이다 우는 중국계 브라질인이고 동메달리스트는 중국의 팡웨이였다. 남중국해에서 영토분쟁을 벌이는 중국을 그가 눌러줬다고 베트남인들이 통쾌해한다는 소식이다. 호앙쑤언빈은 “조국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것이지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며 아내와 두 아이가 동행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공선사후(公先私後)에 투철한 군인정신이 엿보인다. 한국인 감독들이 세계 각국에 진출해 그 나라에 올림픽 메달을 선사하는 것도 국위 선양이다. 

이 진 논설위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