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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어머니 치열했던 발자취

Posted February. 14, 2007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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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보아스를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마거릿 미드(19011978)는 인류학의 어머니다. 미드는 인간 본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탐구하기 위해 오지에서의 고독한 현지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말년에 미드가 쓴 이 자서전은 얼마나 그녀가 자신의 삶과 직업과 사랑과 가족과 인류학에 대하여 진지했고 치열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녀는 50여 년을 남자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하고 고단한 오지의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남태평양의 사모아 제도, 뉴기니의 세픽 강가와 마누스 섬,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서 그녀가 평생 실험하고 연구한 남녀의 문화적 차이와 양육, 문화와 기질의 관계는 당시 프로이트 심리학이 지배하는 인간 과학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었다.

미드는 자신의 삶이 보여 준 것처럼 성과 결혼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인간의 수명이 연장될수록 일부일처제가 평생 지속될 가능성은 적어진다는 생각을 하였고, 결혼에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말 것과 예비결혼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녀는 목사 지망생, 현지 연구 중에 만난 열정적인 인류학자 레오 포천,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혼인하는 등 3번 결혼하고 또 이혼했지만 전남편들과 그들의 배우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도전적 삶을 살았다.

이 자서전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미드의 연구는 항상 실천적인 사회 참여로 행동에 옮겨졌으며 사회활동은 말년까지 그칠 줄 몰랐다. 그녀는 미국 인류학회와 미국과학진흥협회 회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국립 아카데미 회원이었고 세계교회협의회 등 10여 개 조직에도 관여했다. 미드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종교와 여성, 범죄, 음주, 결혼 문제 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대중 강연을 했으며 여성잡지 레드북에 16년간이나 기고를 하여 여성 인권 신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도 미드는 인류학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그 덕분에 미국 사회는 편협한 문명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를 바라보고 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1978년 11월, 미드가 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하였을 때 그녀가 현지 조사를 했던 남태평양의 마누스 섬 마을 사람들은 대추장이 서거했을 때 치르는 5일간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애도를 표했다. 그녀가 사망한 이후 호주의 인류학자 데릭 프리먼은 미드의 사모아 제도 연구가 믿을 수 없이 순진한 것이었다고 비난하는 책을 발간했고, 뉴욕타임스는 이를 1면에 보도하여 미드의 신화가 다시 엄청난 논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사모아 제도를 다시 찾은 인류학자들은 그녀가 옳았고, 객관적이었으며, 매우 훌륭한 연구자였음을 증명해 주었다.

미드의 자서전은 참으로 문학적이고 세심하게 삶과 학문,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 줌으로써 왜 미드가 인류학의 어머니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는지를 가슴으로부터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녀는 자신이 머무는 곳 어디든지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열정적으로 만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