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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야간집회의 유혹

Posted March. 14, 200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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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소설 타올라라 검에는 19세기 일본 마을의 오랜 풍속이 소개된다. 일년 중 정해진 날짜가 되면 젊은 남녀들이 달빛조차 사라진 칠흑 같은 밤에 사원으로 모여든다. 주변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옆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약속된 신호가 떨어지면 남녀는 곁에 있는 상대와 성()관계를 갖는다. 이와 비슷한 게 유럽에서 발달한 가면 축제다. 현대에 들어와 관광 상품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가면을 써서 신분을 감추고 평소 억눌렸던 욕망을 분출하는 일탈의 기회로 이용됐던 것이다.

밤이라는 시간은 인간에게 도덕관념을 느슨하게 하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쉽게 한다. 어둠이 커다란 가면이 되어 익명의 그늘을 제공하는 탓이 크다. 지난해 광우병 촛불집회 때 시위 장소와 그 주변이 무법천지로 바뀐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환한 대낮이었다고 해도 시위대가 경찰관을 집단폭행하고 경찰차를 부셨을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야간 시위는 과격해지기 쉽고 이 과정에서 불법과 폭력이 빚어질 수 있어서다. 이런 내용을 존치한 현행 집시법은 1989년 민주화 정치세력 주도로 만들어졌다.

이른바 진보나 좌파 단체들의 집회는 야간에 집중되고 있다. 오후 늦게 시작해 어두워지면 촛불을 드는 식이다. 문화행사라고 우기지만 그런 목적이 아니라는 건 집회 참가자들이 더 잘 안다. 편법을 동원해서까지 야간집회를 고집하는 것은 밤의 익명성과 선동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다. 촛불집회로 몇 차례 흥행에 성공했던 기억이 야간집회의 유혹을 키웠다고 할 것이다.

이들은 한술 더 떠 야간집회 금지가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위헌 제청에 따라 그제 헌법재판소의 공개변론까지 열렸다. 기어이 야간집회를 합법화하려는 태세다. 그렇게까지 해서 뭘 이루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다. 진보라고 하면 대개는 밝고 양심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런데도 밝은 낮을 놔두고 어두운 밤으로 숨어드는 진보라면 비겁하다. 어둠을 걷어내면 맨 얼굴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이런 진보는 불법과 폭력에 의존하는 가짜 진보다.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