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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슬픈 박사

Posted March. 30, 200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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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대학가 주변 술집에서는 사회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는 대학원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박사학위 취득자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던 때였다.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1991년 3000명을 넘어섰고 1999년에는 65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갈망하는 교수직은 자리가 비어야 하므로 10년을 기다려도 교수가 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른 분야도 선배들로 채워져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공자일수록 사정이 더 나빴다. 미래를 상실한 젊은이들은 변혁과 진보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은 이들이 일으킨 나비 효과의 덕을 본 측면이 크다.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았지만 사회 진출을 봉쇄당한 이들에게 기득권층의 부패와 무능은 커 보였다. 이심전심()으로 동년배들에게도 같은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가난한 시간강사로 나선 이들은 돈 들여 실업자가 되는 길은 대학원 진학이라는 자조를 쏟아냈다. 박사스럽다는 신조어는 쓸데없는 일에 오래 공을 들인다는 뜻이다.

정치에 입문한 운동권 출신의 벼락 입신()과 박사들의 좌절을 대비시켜 보면 세상사의 불확실성이 실감된다. 최근 몇 년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가운데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또박또박 정상적인 코스를 밟아온 박사들은 중간 결산을 해보며 공부의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할지 모른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학생운동 하는 게 훨씬 나은 출세 공식이라는 세간의 비아냥거림도 그들을 괴롭힐 터이다.

대학 구조조정으로 대학 절반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박사 취업난은 앞으로가 더 심각한 문제다. 박사들의 실패로 인해 우리 사회가 공부와 학문을 경시하는 쪽으로 나가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오히려 고학력자의 취업난이 악화되고 있는 것은 지지 세력에 대한 배반이다. 정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부채의식이라도 가져야 한다.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