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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 정략이 아닌 민의담아야

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 정략이 아닌 민의담아야

Posted October. 25, 2016 07:18,   

Updated October. 25, 201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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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개헌논의의 시동을 걸었다. 박 대통령은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에 헌법 개정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 내에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을 설치해 개헌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며 ‘임기 내 개헌 추진’을 공식화했다. 박 대통령은 “1987년 개정돼 30년간 시행된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 헌법은 과거 민주화 시대에는 적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며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새롭게 도약시킬 ‘2017년 체제’를 구상하고 만들어야 할 때라며 “국회도 빠른 시간 안에 헌법개정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국민여론을 수렴하고 개헌의 범위와 내용을 논의해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함에 따라 정치권 전체가 개헌정국에 돌입하게 됐다.

‘개헌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국정의 블랙홀’이라며 논의에 부정적이었던 대통령 발(發) 개헌론이 느닷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헌법·정치학자 가운데는 백년대계를 좌우할 국가 아젠더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데 대해 놀라고,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김재원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불과 2주전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 등의 개헌론에 “청와대는 지금 개헌 이슈를 제기할 때가 아니라는 게 확고한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 수석은 어제 “당시 내가 시정연설문에 포함된 개헌 관련 원고 작성 중이었다”며 “사전에 노출시킬 수 없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국정의 사령탑인 청와대가 대통령의 발표시기를 맞춰주느라 ‘확고한 방침’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거짓말을 해도 되는가.

 청와대의 말이 바뀐 2주 사이 의혹 수준이던 ‘최순실 사건’이 실체가 있는 ‘최순실 게이트’로 번진 것과 대통령 지지율이 사상 최저(25%)로 떨어졌다. ‘좌순실·우병우’ 의혹과 레임덕을 덮기 위해 개헌이라는 블랙홀을 펼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털어내지 못하면 개헌론은 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개헌 추진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도 어제 “현재 국민적 의혹이 있는 부분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한다”며 “개헌으로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고 언명했다.

 박 대통령은 “현행 5년 담임 대통령제 헌법은 과거 민주화 시대에는 적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며 “이제는 1987년 체제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도약시킬 2017년 체제를 구상하고 만들어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6월 20대 국회 개원사에서 “내년이면 소위 ‘87년 체제’의 산물인 현행 헌법이 제정된 지 30년이 된다”며 20대 국회가 개헌을 이루어내는 ‘헌정사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태어난 현행 헌법은 당시 장기집권을 막고, ‘1노3김’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어서 그 수명이 다 했다는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5년 단임제는 임기 안에 치적 쌓기에 급급한 대통령의 경험 미숙과 급조된 정책, 정권교체를 겨냥한 야당의 국정 발목잡기, 집권 4년차만 되면 필연적으로 들이닥치는 레임덕(정권말 권력누수)으로 실패한 대통령들을 만들어냈다. 87년 이후 5명의 전임 대통령은 신임 대통령에게 쏟아지는 환호를 뒤로 쓸쓸히 퇴임했고, 박 대통령에게도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이다. 박 대통령이 “우리 정치는 대통령 선거를 치른 다음날부터 다시 차기 대선이 시작되는 정치체제로 인해 극단적인 정쟁과 대결구도가 일상이 돼버렸고, 민생보다는 정권창출을 목적으로 투쟁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토로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시기적으로 지금이 개헌의 적기(適期)’라는 대통령의 판단도 일리가 있다. 역대 대통령은 임기 후반이 되면 5년 단임제의 한계를 느끼고 개헌론을 제기했다. 그 때마다 차기 유력 대선주자가 ‘권력연장 의도’라고 제동을 걸어 무산됐다. 유력한 ‘미래권력’이 가시권에 드러나지 않는 작금의 상황이 개헌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인 것이 사실이다. 국회의원 가운데 192명이 ‘20대 국회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 회원이어서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개헌 의결정족수 200명에 육박한다.

 그러나 야권의 유력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는 어제 “박근혜 표 개헌, 정권연장을 위한 제2의 유신헌법이라도 만들자는 것인가?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 의혹 해소와 경제민생 살리기에 전념하십시오”라며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민주당 내 친문(친문재인) 의원은 60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도 ‘개헌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이 먼저’라고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국회 내에서도 개헌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야권 주자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개헌을 추진하려면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개헌에서 한발 비껴 설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어제 정부 내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과 국회의 ‘헌법 개정 특위’의 ‘투 트랙’으로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재원 정무수석은 어제 “개헌은 대통령이 주도해야 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4년차에 꺼낸 개헌론에 제동을 건 사람이 다름 아닌 박 대통령이었다. 남이 개헌을 추진하면 ‘권력연장 의도’고, 내가 하면 ‘대한민국의 50년, 100년의 미래를 여는 2017년 체제’인가. 박 대통령은 4월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모임에서도 개헌에 대해 “경제가 살아났을 때 국민들의 공감대를 모아서 하는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과연 지금 경제가 살아났다고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개헌론을 촉발시킨 만큰 일단은 국회에 공을 넘겨주는 것인 순리(順理)다. 국가 대계를 좌우할 개헌은 정치권의 전유물이 돼서도 안 된다. 김무성 전 대표는 어제 ‘범국민 개헌 특위’ 구성을 제안했다. 장석권 전 한국헌법학회장도 “입법부나 행정부 등이 주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독립적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돼도 국민투표를 거치게 돼 있는 만큼 개헌안을 만들 때부터 국민적 합의과정을 거쳐야 한다.

 5년 단임제의 폐해를 손질할 개헌의 핵심은 권력구조 개편이다. 권력구조는 박 대통령이 공약한 ‘4년 중임제’와 국회의원들이 선호하는 의원내각제,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고, 실세 총리가 내정을 총괄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등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차기 주자가 보이지 않는 친박(친박근혜) 세력은 ‘반기문 대통령에 친박 총리’를 골자로 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한다. 여기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려면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난제까지 있어 과연 박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이 가능할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국정치의 상황은 개헌으로 판을 완전히 흔들지 않고서는 ‘구제불능’일 정도다. 18대의 ‘동물국회’, 19대의 ‘식물국회’를 뛰어넘어 20대 국회는 개원 이후 5개월 동안 4번이나 파행을 겪으면서 쓸만한 법안 하나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는 ‘동·식물 국회’로 전락할 조짐이다.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완수할 수 없더라도 본격 논의에 돌입할 때가 됐다.

  ‘2017년 체제’를 열 새 헌법은 통일한국과 1980년대와는 달라진 기본권과 복지 인식, 정보화 사회, 지방분권 등을 담아야 한다. 권력구조만 ‘원 포인트 개헌’을 하려 해선 안 된다. 겨헌 소용돌이 속에서 자칫 안보·경제 위기 관리가 해이진다면 개헌은 안 하느니만 못 하다. 무엇보다 내년 대선을 겨냥한 정략적인 개헌은 성공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개헌을 성공시킨 대통령으로 남으려면 무엇보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틀을 바꾸는 ‘정초(定礎) 개헌’이 가능할 것이다.



박제균논설위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