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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탄보다 타협이야말로 정치의 예술 (

Posted June. 11, 2015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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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회는 일본을 규탄하기 위해 존재할까. 일본을 비난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하지만 국교정상화 50주년을 한 달 앞둔 5월 12일 격렬한 규탄 결의가 두 개나 동시에 가결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표적 중 하나는 아베 신조() 총리의 4월 말 미국 의회 연설. 연설에 침략의 역사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등이 비난의 이유였다. 또 하나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해진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 한반도 출신들이 강제노동 당한 시설들이 등재 대상에 포함돼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한국 측에서 볼 때 불만과 불쾌감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국회가 규탄()할 정도의 일일까. 규탄의 탄은 탄핵의 탄, 탄환의 탄과 같은 한자다. 즉 총알로 꿰뚫듯 상대의 잘못과 죄를 비난할 때 쓰는 말이다. 가장 강한 비난의 표현이다.

필자도 연설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이는 미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고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아시아 여러 국민에 고통을 준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미국 의원들이 이를 환영하며 큰 박수를 보냈는데 이를 다른 나라 국회가 결의로 비난하는 것은 미국에 대해서도 실례가 되는 일은 아닐까. 게다가 일국의 총리를 이름을 박아 규탄하는 것은 적대국이나 하는 일이다.

아울러 일본의 산업 근대화 시설이 세계유산 등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한국 국회가 이를 강도 높게 규탄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은 총알을 맞은 기분이다. 만약 한국 국회가 냉정하게 일본 산업시설을 평가하면서 동포들의 엄청난 고난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세계유산 설명에 추가하도록 요구했더라면 많은 일본인들도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국회는 양쪽 다 가차 없이 탄핵했다. 이래서는 한국에 친밀감을 가진 일본인까지 적으로 돌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한국 국회는 왜 그렇게 감정을 노출하는 것일까. 문득 떠올린 것은 서울대 일본연구소 박철희 소장이 말한 한일 부부싸움 비유론이다.

일본인은 비록 사이가 나빠도 시끄러운 부부 싸움을 절대 남에게 보이지 않고 어느 날 조용히 갈라선다. 하지만 한국인은 남 앞에서도 상관 않고 크게 싸우지만 뭔가 계기가 있으면 껴안고 울고 화해하곤 한다. 한국인이 큰소리로 싸우는 것은 애정이 남아있기 때문으로 관심이 있다는 증거니 오해하지 말라는 얘기다.

실은 그 말은 최근 내가 일본에서 출판한 한국 지식인과의 대화집 한일 미래를 만든다(게이오대 출판회)에 나온다.

그렇다면 이번 국회 결의도 일종의 애정 표현이라고 할 것인가. 하지만 남 앞에서 아내 또는 남편으로부터 심하게 힐난당하면 비록 당장은 참아도 마음에 깊이 남는 게 일본인이다. 그런 규탄 결의는 역효과라는 점을 한국인들이 알아줬으면 한다.

게다가 한국에 대해 말하자면 종군위안부 자료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치부를 일부러 세계유산에 신청하려는 태도는 이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일본인의 마음도 편치 않게 한다.

여하튼 한일은 위안부든 세계유산이든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정치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대화집에서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 것이 최상룡 고려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다. 최 교수는 과거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했고 한일교섭 타결에 뒤에서 협력한 에드윈 라이샤워 박사로부터 타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최 교수가 art to integration(통합을 위한 기술 혹은 예술)이라고 대답하니 그가 만족해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이후 김대중 대통령 방일에 동행해 사죄와 화해를 담은 한일 공동선언 작성에 관여했다. 화해의 예술품인 공동선언을 작성한 최 교수도 50년 전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을 바로 그 시대 고난의 끝에 태어난 타협의 성과라고 평가한다.

타협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 규탄이라면 아이도 할 수 있지만 높은 이상과 어려운 현실 속에서 만들어낸 타협이야말로 정치의 예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