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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던 외화 블랙홀에 빠지듯 사라져

Posted February. 23, 2009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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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화 대비 헝가리 포린트화 환율이 300을 훌쩍 넘어선 21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시내 카롤리 거리. 주말을 맞아 쇼핑을 나온 시민들의 눈길은 길거리 환율 전광판에 쏠렸다.

환율이 폭등하자 집안에 있던 달러를 가지고 나와 환전소에서 환율흥정을 하는 풍경도 등장했다. 부다페스트 근교에 사는 이스트 반(37) 씨는 환전소에서 기준 환율보다 더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환율이 더 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냥 나왔다고 말했다.

환율이 폭등하면서 물건사재기 현상도 나타났다. 같은 날 부다페스트 남부에서 가장 큰 전자 상가인 새턴 매장에선 포린트 화로 매겨진 물건가격을 올리지 않자 가전제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매장 직원들은 이번 주 포린트 화가 더 떨어지기 전에 물건을 사두면 이익을 본다는 소문이 돈 뒤 손님들이 몰려왔다. 그래서 일부 제품은 할인행사 계획을 취소했고, 조만간 가격도 유로화 기준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2차 대전을 겪었다는 연금 생활자 루슬란 루디 씨는 전쟁으로 시가지가 폭격을 맞아도 이보다 더 힘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블랙홀로 빨려가는 외화=헝가리 국민들은 자본주의 체제 전환과 유럽연합(EU) 가입 이후 서유럽에서 지원이 잇달으면서 많은 혜택을 누렸다.

서유럽국가로부터 도로와 도시 정비 기금 지원이 잇달았다. 상품수출이 늘고 서유럽에서 일자리를 구한 헝가리 국민들의 송금이 늘면서 2005년에는 동구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서방 금융기관들로부터 대거 들여왔던 자금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빠져나가면서 순식간에 나라 살림과 가족을 파괴하는 흉기로 변했다.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만져보지도 못한 달러화 뭉치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길을 가던 몇몇 시민들은 답답한 나머지 취재에 나선 기자에게 넉넉하다던 외화가 도대체 어디로 갔다고 보느냐라고 되물었다.

시내 안드레슈 거리의 금융가 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일부 시민들은 그 대답의 실마리를 짚고 있었다. 이들은 이번 사태는 금융 정책의 실패로 일어났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까지 시중 은행들은 외화 대출 금리는 6% 내외로 그대로 두고 포린트 화 대출 금리는 12% 이상으로 대폭 올려놓았다. 헝가리가 지난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과 EU 등으로부터 25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이후 약속한 긴축정책에 따른 것이다.

헝가리는 외국 자본의 추가 이탈을 막기 위해 포린트 화 이자율을 올려놓았지만 이런 이자율 격차 때문에 은행에서 스위스 프랑을 빌린 기업과 가계들이 부쩍 늘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시중에서 외화가 말라가자 코린트 화 가치는 더욱 떨어졌으며 돈을 빌려줬던 외국 투자가들은 헝가리 시장을 떠나가거나 헝가리 정부 국채를 사들이는 등 돈놀이에 열중했다. 그 결과 지난해 10월초까지 유로당 230240코린트 대의 박스권을 유지하던 환율은 2월16일 300을 훌쩍 뛰어 넘었다.

IMF 경고도 무시한 정부=헝가리 쥬르차니 총리의 갈팡질팡 정책은 외환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헝가리 정부는 지난해 12월 22일 IMF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국에서 받은 구제금융으로 철도 부실을 메우고 연금과 공무원 월급 인상에 사용했다.

IMF는 지난해 12월 22일 정부의 재정적자와 인기영합적인 정책이 외환 방어 능력에 대한 위험을 노출시켰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쥬르차니 총리는 지난해 12월 초까지만 해도 연금 개혁과 공무원 월급 삭감 등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국민의 30%가 연금 생활자인 헝가리의 연금 적자 규모는 이 나라 외환보유고의 5%에 달해 재정적자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츄르차니 총리는 연금개혁 계획을 며칠 만에 백지로 돌려놓았다.

국가부도 우려 증폭=헝가리 정부가 외환 위기를 대처할 의지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위기 극복 수단도 남아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옴에 따라 국가 부도(디폴트)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KOTRA의 김종춘 부다페스트 무역관장은 헝가리가 외부에서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에도 가계 지원과 은행 지급 보증을 위해 125억 유로가 추가로 필요하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디폴트 선언 전망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대부분은 헝가리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외환보유고 부족을 겪고 있어 외부의 원조에만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

동유럽에서 성공적인 체제전환국으로 꼽히던 헝가리가 디폴트를 선언할 경우 그 사태가 주변국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유럽 국가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다.

김 관장은 최근 환율 급등 이후 헝가리에서 문을 연 아우디 GE 등 외국기업이 조업을 중단하거나 공장을 폐쇄했다며 유럽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실물 경제 분야에서도 회생 전망이 나오지 않을 경우 상당 기간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위용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