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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천의 얼굴로 동북아 누비다

Posted March. 25, 2006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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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밀접한 한자 3300자를 골라 한글 음과 훈을 단 훈몽자회를 지었고 효경과 소학과 같은 책도 우리말로 음과 훈을 달았다.

중종이 이런 사람은 쉬 얻을 수 없다 하여 그의 품계를 올려 주려 하자 사대부들이 들고일어났다. 역관이 고위직이 되는 것은 천경지의(하늘이 정해 준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

양반들은 당시 국제무역에 발 벗고 나섰던 역관들을 역상()이라 하여 멸시했다. 농본상말()을 내세워 농업을 우대하고 상업을 홀대했다고 하나 그것은 지주였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국사의 논쟁적인 주제를 들쑤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며 새로운 역사 해석의 선봉에 서 온 저자.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되 끊임없이 행간의 의미를 들추어 온 그가 이번엔 역관의 역사적 지위를 복원하고자 나섰다.

조선의 역관들은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그들은 한자 전용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한자의 음을 몰라 중국 사신의 웃음거리가 되곤 했던 양반 사대부를 대신해 중국과 협상을 벌이며 국익을 챙겼다.

숙종 때 청나라와 담판을 벌여 백두산 남쪽을 지켜 낸 김지남 부자도 역관이었다.

역관들은 투잡스족이었다. 외교관이자 국제무역상이었다. 조선 최대의 부자였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거지 행색의 허생에게 선뜻 1만 냥을 내준 변 부자는 집안 대대로 역관을 지냈던 변승업의 손자로 실존 인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얼추 1000억 원대의 재물을 가진 거부였다.

역관들은 어떻게 그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까?

조선은 중국과 일본, 중국과 여진 사이에서 중개무역으로 큰 이익을 남겼는데 국내외 정세에 밝았던 역관들이 거간 노릇을 했다. 거기에다 통역들은 모두 높은 이들에게 등을 대고 있었다.(홍대용 담헌연기) 직업상 국왕을 자주 면대할 수 있었고 사신으로 가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을 수행했으니 정경유착(?)의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사대주의라는 일부 비판과는 달리 조선이 짭짤한 잇속을 챙긴 실리외교였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조선 초 명나라는 3년 1공()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1년 3공을 주장했다. 조공이 있으면 사여()가 있다는 게 조공의 원칙이었고 중국에서는 응당 조공품보다 많은 사여품을 내렸으니 그게 상국의 체면치레였다.

역관들은 축적한 부를 토대로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서얼 출신 장희빈이 궁녀로 입궁해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정권을 세우는 기사환국()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조선 후기 역관 명가였던 인동 장씨 가문이 배후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양반 사대부들보다 많은 재산과 식견을 가졌음에도 신분 상승의 좌절을 겪어야 했던 중인계급의 역관들.

그들은 자주 해외를 나다니며 누구보다도 빨리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했고 새로운 사상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외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극비의 첩보를 빼 오기도 했고, 일제 치하에선 그동안 축적한 거대한 부를 자본으로 독립협회를 지원했다. 31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역관들은 단지 졸부가 아니었다. 조선 제일의 부자이되 그 돈을 나라를 위하여 쓸 줄 알았다. 그들은 조선시대 실물경제의 큰손이었고, 닫힌 시대에 개화를 촉진한 선각자였다.



이기우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