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거울에 몸을 비춰보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다.문신을
마치고 나가는 남자의 어깨가 든든해 보인다.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바닥에 어질어진 바늘과 염료들을
망연히 바라본다.담배를 입에 문 채 염료통과 피를 닦아낸 거즈를 집어든다.그 때 초인종이 길게
두 번 울린다.김사장이 무언가를 놓고 간 모양이라 생각하며 문을 연다.
801호 남자다.남자는 문 앞에 부동 자세로 서 있다.혹시 나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천천히 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오도록
길을 비켜 준다.그는 느린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로 간다.그리고는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내가 문을 닫고 옆에 앉기까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매일 다니는 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어.승강기에서
내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가면,아침 출근을 하면서 길 건너에서 같은 노선 버스를 타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눈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그의
언어는 깊은 사색에서 금방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나는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아채듯 입을 연다.
"당신을,봤어.전쟁기념관에서."
"…승강기 안에서 당신과 마주쳤을 때 당신한테서 지독한 화약 냄새를
맡았어.난 매일 화약 냄새를 맡고 포탄 소리를 듣지.때로 폭격기 소리를 들으러 모니터가 있는
방에 가기도 해.그곳에 앉아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느껴.B29 폭격기에서 바람줄기처럼 떨어지는
폭탄 소리 말야."
"왜 폭격 소리를 듣지?"
"나는 전쟁이 좋아.전쟁은 강하거든.강함은 힘에서 나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힘이야."
"여긴 전쟁 따위는 없어."
"난 당신이 뭘 하는 지 알아.가끔 당신을 찾아온 남자들이 벨을
두 번 눌러야 문을 연다는 것도.일요일에 신문 배달부나 외판원이 한 번만 누르는 벨소리에는 절대로
문을 안 열어."
"나를 염탐했나? 또 뭘 알지? 나에 대해?"
남자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들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한 표정이지.왜
그런 표정인지도 알아.지난달에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가 내게 팔뚝에 새겨진 장검을 보여줬어.그
사람도 알고 있는 거야.무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당신처럼,아름답게 생긴 사람들은,문신을 하지 않아."
"아름답다고? 내 모습을 봐.죽은 사람처럼 하얀 이 피부 좀 보란
말야.내 피부는 선천적으로 너무 하얘서 쉽게 타지도 않아.구릿빛 피부를 만들어 보려고 하루종일
선텐을 해본 적도 있어.그런데 발갛게 달아오르기만 하지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제자리야.나는
언제나 허약하고 소심해 보여.난 그게 싫어."
그는 눈을 지릅뜨고 나를 쏘아본다.방금 전까지 보였던 옅은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연한 갈색을 띠는 그의 눈은 꼭 고양이의 그것과 닮아 있다.의심을 잔뜩
품은 눈.순결을 바치기 직전에 소녀가 가지는 그런 눈.그는 오래된 치부를 드러내듯 조심스럽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 고참들은 내가 곱살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심한
얼차려를 주곤 했어.난 정말 꿋꿋하게 이겨냈지.그런데,어느 날 내 옆에서 잠자고 있던 고참이
내 바지를 벗기고 있다는 걸 알았어.난 꼼짝도 할 수 없었어…."
"……."
"그때 난 알았어.내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거세를
하거나 강해지는 것.…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라 생각해? 강해지는 것밖에 없어.넌 그걸 해
줄 수 있잖아.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 줘.칼이나 활 미사일 비행기 뭐든."
"이건 처녀막처럼 한 번 상처가 나면 다시 봉합할 수 없어.죽을
때까지 네 몸에 붙어 있을 텐데 그래도 하겠어?"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그의 손은 막 삶아 낸 고기지방처럼
따뜻하고 보드랍다.
불판 위에 두툼한 쇠고기를 얹는다.차가운 육질이 뜨거운 불판에 닿자
차사삭 소리를 내며 움츠러든다.한쪽 면이 익은 고깃점을 뒤집으면서 내심 슈크림이 잔뜩 든 빵을
떠올렸다.아주 민감한 한숨을 내쉬게 하는 부드럽고 달콤한 슈크림빵.전화가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스님의 죽음을 알려왔던 문형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문형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처럼 뜸을 들이고 있다.나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문형사의 말을 기다린다.어금니로
질긴 떡심을 잘라낼 때 문형사는 엄마의 죽음을 전했다.엄마는 자살했다.사체는 금정산 계곡 하류에서
발견되었다.시체보관실에 보관되어 있는 시신을 인수해 가라고 문형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명부(冥府)를 읽고 있는 저승사자의 것 같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더 넣는다. 얄팍하게 썬 마늘을
고기 사이에 올린다.기름이 불 위로 떨어져 방안 가득 단백질 탄내를 풍긴다.육즙을 흡수한 마늘을
입 속에 넣는다.덜 익은 마늘이 혀끝을 아릿하게 자극한다. 마늘을 씹으며 바위에 찢긴 엄마의
모습을 상상한다.그러나 상처투성이 여자의 하얀 알몸만 떠오를 뿐 엄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미륵암에서 가져온 엄마의 침낭과 바늘쌈을 찾아본다.그곳에 다녀온
이후 바지주머니 속에 꼭꼭 박아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침낭 안에 든 엄마의 머리카락을 보면
생각이 날 듯도 하다.침낭 끈을 푼다.침낭을 거꾸로 들고 내용물을 털어낸다.침낭에서 짧은 머리카락과
바늘이 쏟아졌다.머리카락은 엄마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짧고 거칠어 보인다.검지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닥으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집어 올린다.그것은 스님의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면도칼을 들고 스님의 머리를 깎는 엄마를 상상한다.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스님의 어깨를 살짝 누르듯 짚고 한 손으로 이발을 하는 엄마.면도칼 끝에서 스님의
머리카락이 스르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아주 고즈넉한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모아 침낭에 넣었을 엄마의 섬세한 손도 생생하게 그려진다.찻상을
가운데 두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는 엄마와 스님의 모습처럼.
엄마는 왜 죽이지도 않은 스님을 죽였다고 했을까? 그리고 왜 스스로
목숨음 끊은 것일까? 엄마가 가장 아끼던 일제 바늘쌈을 펼친다.1호부터 20호까지 금빛 머리를
빛내며 꽂혀 있는 바늘들.손가락 끝으로 아주 미세한 곡선의 감촉을 느끼며 바늘을 뽑아든다.갑자기
모든 신경 세포가 한꺼번에 바늘 끝으로 몰린다.나는 눈을 부릅뜨고 바늘들을 들여다본다.스무 개의
바늘은 전부 뾰족한 바늘 끝이 잘려져 있다.바늘은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채 철사처럼 뭉뚝했다.엄마는
일부러 바늘 끝을 잘라 낸 것이다.
'바늘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어 봐.가늘고 뾰족한 바늘
조각은 내장을 휘돌아 다니면서 치명적인 상처들을 만들지.혈관을 따라 심장에 이르면 맥박을 잠재우며
죽음을 부르는데,아무런 외상도 없어.'
엄마의 생생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길게 두
번 벨을 누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나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발끝으로 사뿐히 걷는 발소리와
문 앞에서 내쉬는 깊은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 하나를 그려
주었다.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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